노광준 OBS ‘오늘의 기후’ PD, 농화학 88
S의 입장에서 11월 12일은 사형선고일이었다. 줄기세포가 언론사에 넘어가는 순간 모든 사람들이 줄기세포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에, S는 줄기세포가 <PD수첩>에 넘어가는 걸 막으려고 사력을 다했다. 수사기록과 법정증언에 따르면 S는 미국에서 국제전화로 서울대에서 줄기세포를 관리하고 있던 연구원 K에게 ‘줄기세포를 절대로 넘겨주지 마’라고 지시했다.
변호인 : 증인은 2005년 11월 9일 K와의 통화에서 MBC가 검증을 위해 체세포와 줄기세포, 모근까지 요구한다는 사실을 듣고 ‘줄기세포를 뭐 하러 주냐, 다 체세포로 줘!’라고 지시했죠?
S : 예. (S의 2007년 8월 28일 법정진술)
사실 S는 그전부터 그랬다. 미국에 있으면서도 황우석 팀 줄기세포가 외부기관으로 넘어간다는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어떻게든 외부기관과의 공동연구로 임상을 추진하던 황 박사와는 정반대의 행보였다.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S는 미국의 코넬대학이 슬로언케터링 암센터와 황우석 줄기세포 공동연구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안절부절못했다. 슬로언케터링은 이미 10살 소년의 임상치료를 위해 황 교수가 넘겨준 줄기세포를 갖고 있었고, 코넬대학은 S가 가짜 섞어심기를 위해 들여온 미즈메디 세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두 기관이 공동연구를 하며 서로가 갖고 있는 줄기세포를 맞춰보는 날엔 자신이 섞어심은 가짜 줄기세포의 정체가 탄로 나는 상황이기에, 그는 코넬과 슬로언케터링이 공동연구를 추진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같은 미즈메디 동료들에게 걱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코넬대학과의) 공동연구 계획을 알리자 S는 서울대 NT cell을 건드리지 말라면서 걱정함’ (검찰수사결과 40쪽)
그러나 언제까지 돌려 막을 수는 없었다. 2005년 11월 12일, 서울대에서 줄기세포를 관리하던 K팀장은 <PD수첩>에게 줄기세포와 체세포 일체를 모두 넘기라는 황 교수의 지시를 받고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는 S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렸다. 그동안 S는 K팀장에게 줄기세포를 절대로 넘겨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해 왔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황 교수님 지시사항이었다고 불가피함을 알렸다. 그 전화를 받은 S의 심경은 어땠을까,
다음날인 11월 13일 저녁 7시 반경, S와 함께 미국 유학 중이던 미즈메디 출신 박종혁 박사가 한국에 있던 황우석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교수님, 제가 (한국에) 나가서 PD 이 새끼, 배를 찔러 죽이고 말겠습니다. S가 약을 먹고 의식불명입니다.”
울부짖는 박종혁 박사의 전화를 받는 황 교수는 뭔가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직감했다. 약을 먹고 의식불명이라니…. 황 교수는 다급히 옆에 동석하던 의대 교수에게 전화를 바꿔줬다. 의대 교수는 박종혁 박사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몇 가지를 물었다. S의 지금 상태에 대한 의학적 질문이었다. 그리고는 황 교수를 보며 이런 말을 했다.
“Suicide”
자살이 의심된다는 소견이었다. 그만큼 S의 상황은 심각했다. 건장한 남자가 의식이 혼미하고 동공이 열린 채 응급실로 실려갔으니, 의대 교수는 그가 예전에 ‘뇌전증’ 병력이 있었는지를 물었고 그게 아니라면 혹시 그의 주변에 유서가 없는지 살펴보라 조언했다. 훗날 검찰은 S의 당시 피츠버그 의대 부속병원(PMC) 진료기록을 확보해 또 다른 전문의에게 보여줬는데, 전문의 소견은 이랬다.
– 치료 목적이 아닐 수 있음. (검찰수사결과 53쪽)
그럼에도 S는 다 털어놓지 않았다. 그날의 사건은 자살기도가 아니었으며 그저 불면이 심해 수면제를 많이 먹었을 뿐이라 말했다. 그가 벌여온 조작의 진실에 대해서도 꽁꽁 숨겼다. <PD수첩> 공방에서도, 서울대 조사 국면에서도, 모두 숨겼다. 이후 검찰조사실에 가서야 털어놨다. 그 사이 바깥세상에서는, 특히 나 같은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원인 모를, 뜻 모를 막장드라마 같은 뉴스들이 계속 터져 나왔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미국의 섀튼 교수였다. 그는 돌연 황우석 교수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그날이 바로 2005년 11월 12일이었다. 한국에서 황우석 팀이 MBC <PD수첩>에게 줄기세포 샘플을 넘겨준 날, 그 소식에 S가 약을 먹고 응급실에 실려간 바로 그날, 미국에서 섀튼 교수는 <워싱턴포스트> 기자를 만나 황우석 팀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그에 대한 나의 믿음이 흔들려왔다. 가슴이 아프다. 난 더 이상 ‘우석’과의 연구를 하지 않을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2005.11.12)
이 소식을 들은 황 박사의 반응은, ‘왜지? 그럴 리가 없는데’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연락을 취해봤지만 섀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당시 황우석 박사의 밀착 경호를 맡았던 서울경찰청 소속 유동수 팀장(가명)은 내게 그날의 상황을 이렇게 말해줬다.
“홍성의 농장에서 실험을 끝낸 뒤 서해대교를 건너오고 있었어요. 저와 박사님이 1호차를 탔고, 저는 앞에 타고 박사님은 뒷좌석에 타고 계셨는데, 강성근 교수(서울대)로부터 전화가 왔더라고요. 뭐라고 전화가 왔냐 하면, 섀튼 교수가 박사님 파트너를 안 하겠다고 발표했다고 보고하더라고요, 그러니까 박사님은 ‘그럴 리가 없는데, 왜 그러지?’ 그러면서 당황한 표정이었어요.” (유동수 당시 경호팀장)
이때까지만 해도 황 박사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왜 S가 약을 먹었는지, 또 자신을 ‘형제’(Brother)라 부르며 따뜻하게 안아주던 섀튼 교수가 왜 돌연 <워싱턴포스트>에 결별선언을 했는지 전혀…. 훗날 황 박사는 내게 섀튼 교수가 결별 선언을 할 당시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섀튼 교수는 결별 선언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황 박사한테 ‘다음 주에 서울에서 보자’며 따뜻한 포옹을 해줬던 친구였다.
“(섀튼 교수와 함께) 미국 뉴욕에서 ‘세계 줄기세포 정상회의(summit)’라는 학술행사에 참석했어요. 사흘간의 일정이었는데 제가 한국에서 SK 초청 특강 일정 때문에 마지막날 일정은 소화하지 못한 채 귀국해야 했죠. 그렇게 저희 일행은 뉴욕의 JFK 공항으로 떠나면서 섀튼 박사께 마지막날 일정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드렸어요. 그러자 섀튼 박사는 늘 제게 그러했듯이 저를 끌어안고 등을 두드려주면서 ‘서울에서 보자’고 했어요. 그 다음주에 서울에서 (세계줄기세포) 허브 논의 미팅이 있었거든요.” (황우석 박사의 말, 2015년 3월 24일)
이랬던 사람이 몇 시간 후 갑자기 <워싱턴포스트>에 결별 선언이라니…. 연락도 두절됐고, 기사를 봤지만 결별 사유도 이해하기 힘들었고…. 섀튼은 난자 윤리 문제를 결별의 주된 이유로 거론했지만 황 박사는 이미 논문 작성 초기부터 섀튼 교수에게 연구원 난자기증을 비롯한 난자 윤리 관련 문제에 대해 있는 대로 상의했으며 오히려 섀튼 교수 본인이 황 박사한테 ‘팩트대로 말하지 말 것’을 조언해 줬다고 했다.
“당시 섀튼 박사가 저한테 굳이 그거를 팩트 그대로 말할 부분이 없다고 조언해 줬어요. 당시 그네들(언론)의 의혹제기가 우리의 성공을 되돌리려는 목적이 아니라 스크래치(흠집) 내는 부분이므로 굳이 팩트대로 말할 필요 없다고….”
이런 가운데 황 박사는 미국에서 응급실로 실려간 S를 위해 치료비를 송금했다. S가 미국에서 의료보험 혜택을 받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S에 대한 ‘입막음용 회유자금’이었다고 비판했지만 당시 황우석 팀과 공동연구를 했던 안규리 서울대 의대 교수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연히 제자를 위한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는데, S가 쓰러지기 몇 달 전 황 교수팀의 제자 중 인도네시아에서 유학을 온 연구원이 있는데 그분이 쓰러지자 황 교수가 (제가 있던) 서울대 병원에서 뇌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하고 수술비 2천2백여 만원 전액을 부담했던 일이 있습니다.” (안규리 교수의 법정증언, 2008년 4월 8일)
이런 가운데 MBC <PD수첩>은 막바지 취재에 속도를 올렸다. 섀튼 교수의 결별 소식이 전해지고 6일 뒤인 11월 18일, <PD수첩>은 2005년 <사이언스> 논문의 제2저자였던 노성일 미즈메디 병원장을 인터뷰한다. 논문에 대한 이런저런 의혹에 대해 묻던 피디는 돌연 노 이사장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줄기세포를 본 적 있느냐고.
피디 : 실제로 줄기세포를 보신 적은?
노성일 이사장 : 본 적은 없습니다.
이날 노 이사장은 사실과 다른 답변을 했다. 그는 줄기세포를 본 적 있다. 복제 개 스너피가 태어난 2005년 4월 경 당시 서울대를 찾아온 영국의 이언 윌머트 교수와 미국의 섀튼 교수 등과 함께 최소 한 번은 줄기세포를 직접 관찰했다. 노 이사장 본인도 훗날 법정에 출석해 ‘줄기세포를 본 적 있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줄기세포를 이언 윌머트라고 영국에서 오신 분하고 같이 한 번 본 적은 있습니다.” (노성일 이사장의 법정진술, 2007년 1월 30일)
이처럼 줄기세포를 본 적 있던 노 이사장은 왜 당시 <PD수첩>과의 인터뷰에서는 줄기세포를 본 적 없다고 사실과 다른 말을 한 걸까, 당시 그의 말은 나처럼 줄기세포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일반 시청자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아니 논문의 제2저자조차 줄기세포를 본 적 없다는데, 뭔가 어두운 비밀이 있을 거라고 직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섀튼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PD수첩>이 확보한 논문 주요 저자들의 영상에는 섀튼 교수의 인터뷰도 있었다. 그 역시 황우석 줄기세포를 수도 없이 관찰해 온 연구자였지만 <PD수첩> 카메라 앞에서는 1번 줄기세포는 확실히 봤지만 나머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는 식으로 알듯 모를듯한 말을 했다.
그 무렵 <PD수첩> 제작진이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황 박사의 자살이었던 것 같다. 제작진의 책과 인터뷰를 보면 황 박사처럼 자존심 강한 연구자가 자신의 연구가 거짓임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지, 그렇게 되면 여론은 황 박사의 편으로 급격히 기울게 될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우려는 기우가 아니었다.
11월 18일, 결국 황 박사도 줄기세포의 진실을 알게 됐다. <PD수첩>에 넘긴 것과 똑같은 샘플을 <YTN>에 넘겼는데, 이를 받아 분석한 고려대 법의학교실의 DNA 지문분석 결과, 줄기세포가 가짜임을 받아본 거다. 어땠을까, 그는 심하게 흔들렸다. 그럴 리 없다고 뭔가 잘못된 거라고 판단했다. 훗날 황 박사 측과 윤현수 한양대 교수(미즈메디 출신)의 법정진술을 종합해 보면 당시 상황은 이러했다.
11월 18일 고려대 법의학교실의 결과를 받아본 황 박사는 곧바로 그동안 줄기세포 검증을 맡아온 미즈메디 출신의 윤현수 교수(한양대)를 불렀다. 윤 교수는 사이언스 논문의 모든 DNA 검증을 책임져온 전직 미즈메디 연구소장이었다. 논문을 쓸 당시 틀림없이 모든 DNA 분석 결과 복제된 게 맞다는 데이터를 건네줬던 그였다. 황 박사는 그런 윤현수 교수를 불러 다시 한번 줄기세포를 검증해 달라고 부탁했다. 급히 검증을 해본 윤 교수는 황 박사에게 전화로 검증결과를 알려줬다. 고려대 검증이 맞다고. 복제 줄기세포가 아니라고. 모든 줄기세포의 DNA가 체세포 공여자의 것이 아닌 미즈메디 줄기세포의 DNA와 일치한다고. 즉, 바꿔치기였다는 게 확인된 거다. 그러자 2차 멘탈 붕괴가 왔다. 어쩔 줄 몰라하는 황 박사에게 윤현수 교수가 제안했다. 지금까지는 냉동보관된 줄기세포들만 검사해 봤는데, 이번에는 얼리지 않고 배양시키고 있던 줄기세포들을 검사해 보면 어떻겠냐고. 그렇게 했다. 이왕이면 사이언스 논문 검증을 맡았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장성 분소)에 다시 검증을 맡겼다. 그렇게 하여 배양 중이던 줄기세포들에 대한 국과수 검증결과까지 나왔다. 결과는 똑같았다. 배양 중이던 줄기세포들도 모두 미즈메디 병원에서 수립한 수정란 줄기세포 DNA와 일치한다고 나왔다. 그날은 11월 20일이었다. 황 박사는 그제서야 모든 상황을 직시했다. 완전한 멘탈 붕괴. 그는 국과수 결과를 통보받고 즉시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세계줄기세포허브 사무실에 서울대 수의대의 이병천, 강성근 교수, 그리고 서울대 의대 안규리 교수가 긴급히 달려왔다.
11월 20일의 내부 대책회의, 이날 회의에 대한 두 개의 기억이 있다. 정반대의 기억들이 맞부딪친다. 먼저 황 박사의 기억,
“모든 것을 밝히고 내 목숨을 희생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국민들께) 사죄할 수 있다면 그것이 저의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옆에 있던 교수들이 울면서 저를 말렸죠. 안규리 교수가 저를 만류하며 이렇게 말했어요. 이것은 사고일 뿐이다. 항해사고. 배를 몰고 긴 항해를 떠나다 보면 늘 뜻밖의 사고를 만나는데 그 사고로 선장이 배를 지휘하지 못할 때는 항해사가 키를 잡고 나아간다고. 이제부터 자신(안규리)이 임시 선장이 되어 지휘할 테니 황 교수님은 안정을 취하시고 다른 교수님들은 제 지휘에 따라 주시라고.” (황우석 박사의 말, 2015년 8월 4일)
그러나 안규리 교수의 기억은,
“저는 황 박사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당시 황 박사의 눈빛은 무서웠습니다.” (안규리 교수의 2008년 4월 8일 법정증언 요약)
분명한 건 이날의 대책회의가 끝난 뒤 황우석 팀의 임시선장은 안규리 교수였다는 점이다. 당시 줄기세포 임상시험이나 무균돼지 장기이식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던 안규리 교수는 다급히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피츠버그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S를 찾아간 거다. 옆에는 <YTN> 김진두 기자도 동행했다. 김 기자는 S를 만나 당시 <PD수첩>이 S를 만나 건넸던 발언들, 황우석만 주저앉히면 된다, 검찰수사가 임박했다, 등의 발언을 확보하며 이 막장 드라마에 참전했다.
펜을 잠시 내려놓고 생각에 잠긴다. 그때 만일 황 박사가 국민들 앞에 모든 걸 사실대로 밝혔다면 어땠을까? 부서졌겠지, 하지만 지금처럼은 아니었을 테지, 하지만 이 또한 결과론적인 해석일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멘탈 붕괴. 한순간에 자신을 지탱해 오던 모든 게 신기루였다는 걸 깨달은 사람만큼 무기력하고 비참한 존재가 또 있을까, 어떤 이성적 판단을 기대하는 것도 당시 상황에서는 무리한 요구일 수 있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한편으로 거대한 쓰나미 앞에서 키를 잡고 항해를 계속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또한 속절없다는 생각도 든다. 작용이 있다면 반작용이 있기에, 인간은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을 갖지만 그 계획은 실제 절반도 마음 먹은 대로 실현되기 어렵고, 그래서 전투경험이 풍부한 장수일수록 내가 친 만큼 나의 목이 잘려나갈 확률도 높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것을, 그러하기에 그냥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까발리고 운명에 몸을 맡겼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반론의 반론도 고개를 쳐든다.
이런 가운데 <PD수첩>의 첫 번째 방송이 시작됐다. 이틀 뒤인 2005년 11월 22일 밤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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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광준_ 우리농촌연구회에서 농업농촌의 현실을 깨닫고 토양학 실험실에서 흙을 연구하던 중 BBC ‘Farming Today’같은 농업전문방송을 꿈꾸며 방송에 입문, KBS TV 구성작가와 경기방송 PD를 거쳐 2023년 3월부터 OBS 라디오(FM99.9MHz) ‘기후만민공동회 오늘의 기후’를 연출하며 한국PD연합회가 선정한 2023년 5월 ‘이달의 PD상’과 제50회 한국방송대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별명 기후보좌관. (pdnkj@naver.com)
Last modified: 2026-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