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삼 농경제 79
요즘처럼 냉전 시대가 오히려 ‘질서의 시대’였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경우가 없다. 굳이 설명하자면 냉전 시대에는 ‘소련 vs 미국’이라는 명확한 양극체제가 있었고, 이는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힘의 사용을 상호억제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냉전을 ‘규칙이 있는 대결’이었다고 한다면 현재는 ‘규칙이 없는 경쟁’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심지어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대통령 납치에서 보여주었듯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세계 최강대국의 위상을 전 세계에 과시한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자신있게 “나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의 도덕성, 나의 생각뿐이다. 내게 국제법은 필요 없다.”라고 공언하며 그린란드의 소유권까지 주장하고 나선다.
더 이상 어떠한 규범이나 공동의 선도 작동하지 않는 세계 속에서,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세계 시민들은 ‘위반 비용’보다 ‘행사 이익’이 더 큰 현실 앞에서 규범과 국제 질서보다 이익과 힘이 훨씬 더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모습을 그저 무기력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규범의 파괴, 이익과 힘의 작용이 비단 일개 초강대국에서만 작동하는가? 단연코 아니라는 것을 모든 독자들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무자비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초강대국의 완력이 새로운 질서로 작동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전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에너지·곡물·반도체 등 핵심자원의 가격·공급 변동, 금융제재, 그리고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나타나고 있는 SNS·미디어를 통한 정보 과잉·왜곡 등의 조작(Manipulation)과 조종(Control)이 바로 그것이다.
필자는 지구 46억 년의 역사와 진화의 과정에서 소위 “지혜 중의 지혜”임을 자처하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만이 이러한 조작과 통제의 달인은 아니리라 추측하면서 지구 여러 생명체를 탐색해 보면서 인간 못지않게 조작과 통제의 기술을 통해서 생존해 가는 생명체들을 본다. 그러나 이들 생명체들은 인간들과 달리 체계적인 전략과 전술, 그리고 기만과 왜곡을 보이지 않는 것 같다.(어쩌면 이들도 그들 수준의 전략과 전술, 기만과 왜곡을 수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 조작(manipulation) – 동충하초(冬蟲夏草)
TV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등에서 해발 3,000~5,000m의 티벳이나 네팔 고원 지대에서 눈 녹은 4~6월 사이에 거친 산바닥을 하루 종일 기어 다니며 무언가 채취하고 있는 장면들을 보곤 한다. 소위 “땅 위의 황금”이라고 불리는 동충하초를 캐는 사람들이다.

동충하초는 곤충에 기생하는 균류(버섯류)의 일종으로 자낭균류(Ascomycota)에 속한다. 이들의 성장 원리는 공기 중의 포자가 곤충의 유충(주로 나방 애벌레)의 피부, 호흡공, 소화관 등에 침투하여 숙주 내부를 장악하고 조작함으로써 궁극에는 숙주를 사망에 이르게 한 후 버섯의 형태로 발아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들 균사는 숙주 몸 안에서 천천히 퍼져나가며 숙주를 즉시 죽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영양분을 공급받는다. 그 과정에서 이들 균사들이 은밀히 진행하는 행동은 곰팡이가 숙주의 신경전달물질에 영향을 주어 근육의 수축하는 패턴을 변화시키고, 숙주의 행동을 미세하게 유도하여 애벌레가 땅속 특정 깊이로 이동한 후 머리를 위로 향한 자세를 유지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 곰팡이를 “zombie fungus”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침내 이들 곰팡이는 숙주 내부를 완전히 채움으로써 장기·근육을 균사 덩어리로 대체하고 오랫동안 기다렸던 결정적 순간, 즉 숙주의 사망을 선언하게 되는데, 이 순간부터 더 이상 이 덩어리는 벌레가 아니라 균사의 저장고가 되어 차세대의 번식을 준비한다.
이것이 바로 학술적으로 ‘곤충병원성 균류에 의한 숙주 행동 조작(Host behavioral manipulation by entomopathogenic fungi)’ 행위이다.
2. 조종(Control) – 기생말벌(Glyptapanteles spp.)
이들은 애벌레의 몸을 조종을 하는 녀석들이다. 암컷 말벌은 나방 애벌레의 몸속에 수십 개의 알을 낳으면서 동시에 특수한 형태의 바이러스를 주입하여 숙주 면역을 억제하고, 신경계 반응 경로를 변경함으로써 조종을 위한 준비를 마친다. 이후 이들 말벌의 유충은 애벌레의 장기 사이에서 성장하면서 중요한 신경을 결코 건드리지 않기 때문에 애벌레는 외관상으로 멀쩡하게 정상적인 성장을 하는데, 이 단계까지는 ‘기생’이지 ‘조종’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일정 시점이 되면 말벌 유충들이 한꺼번에 숙주 밖으로 탈출하게 되고 애벌레의 몸 옆에서 고치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비로소 애벌레는 먹이 섭취와 이동을 중단하고 말벌의 고치를 ‘경비’ 서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때 말벌 유충의 일부는 애벌레의 체내에 남아 지속적으로 신경 신호를 방출하면서 숙주의 운동 명령을 차단하고 방어 행동만 유지하게 함으로써 애벌레는 고치를 보호하고 외부 포식자의 공격을 방어하는 ‘살아 있는 방패’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사례에서 우리는 인간 사회에서 나타나는 조작과 조종의 모습들을 자연 진화의 선택 행동에서 발견하게 된다. 정보 교란과 압박을 통해서 마치 자발적 선택 같지만 실제로는 정보 혼란에 따른 정치의 양극화 현상과 같은 ‘조작’ 행위, 혹은 군사적 점령 또는 강제적인 안보 종속을 통해서 핵심 결정권에 대한 사실상의 거부를 불가능하게 하는 ‘조종’ 행위 따위가 현재 전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생존 법칙이 되고만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인류가 그동안 국제 질서 유지에 그나마 일정 정도의 유효성을 보여왔던 규범이 붕괴하고 힘의 비대칭성이 확대되면서 내부적 분열이 국제화되는 과정이 만연함으로써, 4만 년 동안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규칙은 사라졌지만 행동의 패턴은 존재하는 ‘무질서의 질서’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복잡계의 상태에 들어선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그렇다면 내가 꿈꿔왔던 세상은 없는건가?
지금 이 순간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ABBA의 노래 <I Have a Dream>.
I Have a Dream, a song to sing
to help me cope with anything.
If you see the wonder of a fairy tale,
you can take the future even if you fail.
I believe in angels
something good in everything I see.
I believe in angels
when I know the time is right for me.
I’ll cross the stream.
I Have a Dream
.
오정삼_ 젊은 시절 학생운동, 노동운동에 투신하였으며 결혼 후 40년 가까이 서울시 강북구 주민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사)삼양주민연대 사무국장으로 주민 참여와 자치를 통한 풀뿌리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주민 권익과 협동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한 활동에 매진하였으며, 서울시 혁신교육지구 사업과 함께 ‘더불어 현재를 즐기고 미래를 여는 청소년’의 비전을 바탕으로 삼양동청소년아지트 센터장을 역임하다 퇴임하였다. (baroaca@gmail.com)
Last modified: 2026-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