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은경 『그날은 못 갔는데 오늘은 가야겠다』 저자 농학 95

<남태령 아스팔트 동지회>는 지난해 12월 21일 동짓날에 출범한 조직이다. 윤석열 탄핵 시위가 한창이던 2024년 12월 21일, 남태령 고개에서 트랙터 진입이 막힌 농민들을 지키겠다고 청년 여성과 성소수자 시민들이 달려간 ‘남태령 대첩’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사회적 약자인 농민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약자인 청년과 소수자들이 아무 조건 없이 연대하고 서로를 도운 ‘남태령 대첩’은 이후 수많은 사회적 사안들에 달려가 연대하는 ‘말벌 시민’이라는 새로운 운동권이 탄생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는 7월 10일 국회 등에서 열린 강연에서 “우리가 전태일, 세월호, 백남기 농민, 이태원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듯이,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남태령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상진기념사업회>는 1975년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김상진 열사의 뜻을 기리는 회원들이 모인 조직이다. 김 열사의 뜻을 각자의 일상에서 실천하려 노력하며 한국 농업의 미래와 민주주의의 앞날을 고민하지만, 한편으론 그 뜻을 이어갈 후배 세대가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후대가 없다는 문제는 사실 그동안 모든 ‘민주화운동 세대’의 고민이었다. 그러던 차에 지난 윤석열 퇴진 광장을 계기로 등장한 (어쩌면 그제야 기성세대의 눈에 들어왔는지도 모를) 응원봉 세대 혹은 깃발 세대에 쏠린 애정 어린 관심과 궁금증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7월 12일 서울 원서동 <노무현 시민센터>에서 가진 <남태령 아스팔트 동지회>(이하 남아동)와의 만남에서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성세대가 ‘남태령 세대’를 궁금해하는 것 못지않게, 그들 역시 ‘선배’들과의 대화에 목마르다는 것을. 이날 인터뷰에는 정근우 회장과 안병권 이사, 임세진 『선구자』 편집주간이 참석했고, 남아동에서는 운영 접주(동학의 ‘접주’에서 따온 호칭)인 김후주, 최별, 김지민(뒷부분 인터뷰에 참석해 말을 보탬) 씨가 나와주었다.<편집자 주>
김상진기념사업회가 ‘6월 민주항쟁’ 직후인 1988년에 생겼다고 정근우 회장이 설명하는 대목에서 최별 접주가 잠깐 웃었다. “제가 1988년생인데요”, 하고. “우리 기념사업회랑 나이가 같네요”, 하며 정 회장도 마주 웃었다. 영화 『1975. 김상진』을 제작하고 동학에 관한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던 안병권 이사는 “21세기의 접주들을 만나러 왔다”며 감격해했다.
남아동 접주(회원)는 현재 80명 정도이고, 운영 접주는 4~5명이다. 선배들은 남아동이 동학 용어를 쓴다는 점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나도 얼마 전 참석한 남아동 행사에서 둥근 ‘사발통문’ 형식으로 된 방명록을 보고 신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남아동은 앞으로 지역 조직이 생기면 각 지역에 ‘집강소’를 세우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동학 용어 사용은 남태령이 <전봉준 투쟁단> 농민들의 싸움에서 비롯한 자리였다는 영향도 있지만, 남아동이 앞으로 가고자 하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어느 정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기념사업회랑 나이가 같네요”
“저희가 남태령을 경험하고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무조건 ‘이걸 남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남태령 관련 기록을 모으고 심포지엄을 열고 인터뷰, 기고, 강연 요청 등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받아들였죠. 서울에서 행사를 열면 청년들이 많은데 지역은 대체로 연령층이 다양했고, 남태령에 정말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고 얘기를 듣고 싶어 하시더라고요. 지난해 그렇게 많은 분들을 만나고 다닌 것이 지금 남아동을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미쳤어요.” (김후주)

남태령을 알리려는 그간의 노력은 적지 않은 성과로 돌아오고 있다. 얼마 전 개봉한 김현지 감독의 다큐 영화 『남태령』은 전주 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됐고, 김후주 접주는 지난 5월 이태리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석해서 <남태령 아스팔트 동지회> 선언문을 읽었다.
“남아동은 일차적으로 ‘현장에서 몸으로 뛰는 말벌 시민들에게 우산이 돼 주고 싶다’는 실용적인 이유에서 시작했어요. 여기에 더해 ‘마음은 있는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는’ 분들의 자원을 현장에 연결해주는 플랫폼 역할도요. 남태령에서 우리가 한번 봤잖아요, 거기에 뭐가 얼마나 쏟아져 들어왔는지. 그걸 좀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모델이 없을까 생각했는데, 아무리 봐도 기존 조직 중에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 없더라고요.” (최별)
김후주 접주는 지난 4월에 경남 진주에서 씨유 트럭에 치여서 돌아가신 노동자 조문을 갔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지역에 있는 동지에게 필요한 것을 물으니 김밥 등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기에 트위터에 알리고 모금을 했는데, 서너 시간 만에 오백만 원이 모였다. 그걸로 김밥과 음료를 마련해서 갔고, 나머지는 조의금으로 기부하고 왔다는 것이다.
“그 오백만 원이 모였을 때 제가 든 생각이, 사람들이 관심이 없는 게 아니고 직접 연대에 나설 물리적인 시간이 없다는 거였어요. 돈을 보내준 사람들은 대부분 지난해 광장에 있었던 사람들 아니었을까요. ‘진주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던데’ 하며 그들이 보내준 만 원이나 삼만 원, 혹은 오천 원이 모여서 오백만 원이 된 거고, 그때 그 사람들이 변함없이 온라인으로 현장 소식을 보고 있는 거죠.” (김후주)
“말벌들은 어느 정도 가시화되어 운동 조직 안에 있지만, 그 울타리 바깥에도 분명히 유효한 정치적 에너지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뭘 갖다 주고 음식을 배달시키고 아침이 되어 찾아왔던 남태령을 생각하면 분명히 그분들이 있단 말이죠. 남태령이 승리할 수 있었던 건 그 한 명 한 명의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잖아요. 이걸 어떻게 운동으로 만들어낼까. 그분들이 때에 따라 나타났다 흩어지는 것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조금만 더 모아보면 뭐 하나라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최별)
현장에 참여하고픈 시민들을 연결하는 플랫폼이 되고 싶어
최별 접주는 말벌들의 활동이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되거나, 조직된 활동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영향력은 당연히 차이가 있겠지만, 참여하는 형태가 다를 뿐 그 개인의 활동과 마음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태령에서는 마이크를 든 사람 하나하나의 자유 발언이 모두 중요했다. 평등을 말하는 평범한 사람 한 명 한 명의 주체성을 존엄하게 여기는 운동이 그가 꿈꾸는 것이다. 각 개인의 참여가 모여 거대한 물결이 되는 것이 바로 동학적인 것이고 진짜 민중운동일 테니까.
“일전에 다른 기념사업회에 갔다가 ‘옛날에는 조직이 있어서 위에서 지령을 하달하는 식으로 움직였는데, 지금은 그게 없이 어떻게 운동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예전 민주화운동 세대는 하나의 구호 아래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싸웠다면 지금은 각자의 입장이나 정치적인 위치가 조금씩 다 달라요. 똑같은 하나의 의제로 포섭되는 단일 대오가 아닌 거죠. 그리고 지금은 한 현장에만 가지 않잖아요. 세종호텔에 갔다가 A학교 공대위에 갔다가 택시 지부가 고공농성 한다니까 인천에도 가고 화물연대 조합원이 돌아가셨다니까 진주도 가죠. 단일한 위력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다양성을 포용하는 또 다른 힘이 있어요. 새로운 운동권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이렇게 완전히 양상이 다르다는 얘기를 해드리면 민주화운동 세대 선배들은 ‘아직도 모르겠다’고 하세요.” (김후주)

정근우 회장이 ‘나도 비슷하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웃음과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선배들은 되도록 경청하는 자세로 이야기를 들었고, 접주들이 새로운 세대의 운동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 식으로 인터뷰가 이어졌다.
“올해 5월에 남아동이 광주에 가서 오월민주여성회 선생님들을 만났어요. 그중에 『양림동 소녀』라는 책을 내시고 평생 급진적인 노동 투쟁을 해오신 임영희 선배님이 단언하듯 말씀하시더라고요. 광주 민주화운동은 아주 평범한 ‘민중’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요. 제 생각에는 남태령도 그랬던 것 같아요.” (최별)
남아동은 올해 광주 <오월미술제>에 참여해 남태령 자유 발언 녹취본으로 만든 아카이빙 성격의 작품을 전시했다. 오월미술제 이후 대구에서도 같은 작품으로 전시가 열렸다. 대구 전시에서는 부대 행사로 5.18 젠더 폭력 생존자들과 10월 항쟁 유가족이 만나는 자리도 있었는데, 그 현장에서 남태령 자유 발언 전시를 했다는 것을 최별 접주는 의미 있게 기억했다. 남태령도 국가 폭력에 맞선 민주주의 항쟁의 현장이었으니까.
‘단일 대오’ 아닌 새로운 세대의 운동, 다양성 포용하는 또 다른 힘 있어
남아동은 출범한 지 반 년 남짓한 신생 조직이지만 3월 말 접주 대회 개최, 제주 4.3 기념식 참석, 6월 서울 퀴어퍼레이드에서 부스와 트럭 행진 운영, 경북 상주 언니네텃밭 농활, 영화 <남태령> 상영회, 박종철 시민학교 참석 등 많은 행사를 누구보다 바쁘게 소화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많은 이야기 중 선배들이 특히 ‘기발하고 재미있다’며 관심을 보인 것은 호미다. 호미는 수많은 접주들의 높은 호응을 얻은 남아동 공식 ‘굿즈’다.
“남태령에서 트랙터가 상징적으로 주목받았지만 사실 우리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호미에요. 남성 농민의 소유인 트랙터와 달리 호미는 여성들의 농기구이고, 농사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 도구죠. 기후 아포칼립스에 대비해 농사를 지을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호미 워크숍을 하고 농활을 다니는 등 관련 활동을 하고 있어요. 영주대장간에서 제작한 호미를 남아동 굿즈로 만들어서 판매도 하고 있고요.” (최별)
기후 위기로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슨 기술이 필요할까? 총 쏘기? AI 다루기? 다 아니다. 바로 농사를 지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이들이 내린 결론이다. 지난해 김후주 접주가 남태령을 알리기 위해 수많은 강연을 다니면서 강조한 것도 이것이었다. 한국 농촌에는 더 이상 농사지을 사람이 없고 식량 위기가 코앞으로 다가왔으며, 기후 위기에 더해 전 세계적으로 식량 전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모두가 결국 멸망으로 가고 있다는 것. 그러니 ‘내일 지구가 망하더라도 오늘 우리는 호미를 들겠다’는 것이다.
호미를 굳이 굿즈로 보급하는 것은 남아동이 되도록 사람들 간의 직접 만남을 지향한다는 점과도 통한다. 남태령은 수많은 이들과 직접 만나 몸으로 함께 겪은 경험이었다. 그게 얼마나 사람들을 바꾸고 삶을 바꿀 수 있는지 깨달은 현장이기도 했다. 온라인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을 한 번이라도 실제 만남으로 이끌고 함께 흙을 만져보려면 실물 호미가 중요한 매개가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남아동은 이제 출범한 지 반 년 남짓 된 조직이고, 지금은 되도록 문턱을 낮추고 사람들이 재미있어할 만한 일들을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과정에 있어요. 저희는 기존 운동 조직처럼 단일 대오나 구호를 추구하지 않고 완전히 새 판을 짜고 싶어요. 운동 선배들이 조직을 운영했던 방법이나 교훈을 배우려고 하겠지만, 동시에 새롭게 탄생한 사람들을 포용하고 도시와 농촌을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 싶어요.” (김후주)
‘내일 지구가 망하더라도 오늘 호미를 들겠다’
남태령에 모였던 사람들이 그랬듯이, 남아동 회원의 상당수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도시 청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굳이 호미를 드는 이유가 있다. 김후주 접주의 설명에 따르면, 남태령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것이 농민들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날 남태령에서 막힌 것이 ‘강철 노조’로 통하는 금속노조나 화물연대였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달려갔을까. 농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도 열악한 상황이면서 시골집에 온 자식, 손주들 대하듯 청년들을 챙기고 음식을 먼저 먹이려고 했다.
“남태령 직전에 정부 국민신문고 웹사이트가 사상 초유로 멈춘 일이 있었어요. 경찰이 트랙터 서울 진입을 불허한 것에 대해서 제가 SNS에 ‘국민신문고를 두드려 달라, 온라인에서 연대해달라’고 호소했더니 너도나도 신문고에 민원을 넣어서 웹사이트가 마비됐죠.” (김후주)
“그때 또 사람들의 공분을 일으켰던 것이 2016년 박근혜 퇴진 시위 때 트랙터를 몰고 올라왔던 전봉준 투쟁단 김영호 총대장님이 경찰에게 맞아 터진 머리에서 피 흘리는 사진이었어요. 약자인 농민들을 특히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데 대한 분노가 트위터에 쫙 퍼졌어요.” (김지민)
그러니까 남태령에 모인 사람들을 움직인 힘은 약자에게 연대하려는 다수의 선한 의지였고, 농민들 역시 평생 흙을 밟으며 몸에 밴 돌봄과 환대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펼친 현장이 남태령인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다 드러내고 처한 상황을 공유하고, 서로를 진심으로 위로한 남태령 ‘자유 발언’도 그런 현장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의 마음이 시너지를 내면서 큰 힘을 발휘한 것이 마침내 경찰 차벽을 열어 승리한 ‘남태령 대첩’이었다.
“남태령을 분석할 때 많은 연구자들이 놓치고 있는 게, 농민들의 현장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들이 분명히 있어요. 우리가 호미를 드는 이유는 남태령이라는 현장이 농민·농업 이슈에서 시작한 것이고, 그것이 남아동만이 가질 수 있는 테마 혹은 상징성이 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해요. 그것이 성평등이나 노동 등 다른 문제를 다루지 않겠다는 뜻도 아니고요.” (김후주)
“이번 전봉준투쟁단 서군 대장이셨던 이갑성 전 전농 부의장님 말씀이 기억에 남아요. 많은 농민분들이 비슷한 말씀을 하셨는데, 남태령이 생애 최고의 날 중 하나였다는 거예요. 그분이 특히 감동 받은 것은 자유 발언이었대요. 쏟아져 나온 청년들이 너도나도 자유 발언에 나섰던, 진정한 민주주의가 펼쳐진 아크로폴리스 광장이었죠. 시작은 트랙터 투쟁이었지만 남태령의 핵심은 그 자유 발언이라는 거죠.” (최별)
“그 자유 발언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연대의 장’을 만들었다는 거예요. 남아동이 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고요. 접주라면 누구나 그 연대 안에서 같이 해보고 싶은 의제를 제시할 수 있고, 다양한 것에 함께 할 의사가 우리에게 있어요. 트위터에서 연대 요청이 왔을 때 바로 진주까지 달려갔던 것처럼, 그냥 같이 있어 주는 것부터 시작하려고 해요. 그런데 우리는 남태령에서 시작했으니 지금은 농민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죠.” (김지민)
느슨하지만 촘촘한 ‘연대’, 운동의 새 판 짜고 싶어
남아동이 중요하게 여기는 또 다른 것은 기록이다. 앞서 트위터리안들의 공분을 일으켜 남태령에 관심이 집중되게 만들었던 피 흘리는 농민의 사진은 김후주 접주가 게시한 것이다. 그는 당시 트위터에서 백남기 농민 이야기도 했다. 일어난 지 오래된 일도 아니지만, 처음 듣는 젊은 세대에겐 마치 서동요 같은 전설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말을 하지 않으면, 기록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남태령을 직접 겪은 이들에겐 그것이 삶을 바꿀 만큼 엄청난 일이었지만, 언론 보도가 많이 되지 않은 탓에 또 어떤 이들은 남태령을 거의 알지 못하기도 한다. 이것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다 사라지겠다는 생각이 들어 X(트위터)에 ‘남태령 기록보관소’를 열고 아카이빙을 시작했고, 남태령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남태령을 알리기 위해 수많은 강연을 다녔다. 남은 목표는 남태령의 기록을 한 권의 책으로 출간하는 것이다.
“남아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또 다른 주제인 ‘우리의 운동을 찾아서’도 말하고 싶어요. 지난해 남태령 첫 돌 행사에서 말벌 시민과 집담회를 했는데, 그분들이 남태령 이후에 함께 하고 싶은 것으로 이전 세대의 운동 경험과 접하는 일을 꼽았어요. 후일담이어도 좋고 꼭 진지하지 않아도 되니 과거 운동의 역사를 알고 싶고, 그 운동을 했던 분들의 얘기를 듣고 싶은 거죠. 그런 이야기들을 저희 웹진을 통해 많이 알리고 싶어요.”
여러 사람이 말을 보태다보니 인터뷰가 세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긴급조치 세대’, ‘서울의 봄 세대’, ‘87 세대’ 이후 한참 만에 나타난 ‘남태령 세대’를 위해 앞선 세대가 뭘 해줄 수 있을까. 남아동 접주 가입, 민주동문회 차원의 영화 『남태령』 단체 관람, 강의나 간담회 자리 마련 등의 얘기가 나왔다. 대학마다 총학생회도 거의 사라진 요즘, 과거 운동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남태령 세대’의 제안이 인상 깊었다고 선배들은 말했다.
오랜 시간에 걸친 인터뷰가 끝난 후, 접주들은 앉은 자리에서 따로 남아동 운영 회의를 시작했다. 인터뷰를 한 다음 주말에는 전북 정읍으로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청년위원회에서 주최한 ‘동학 역사 기행’을 다녀왔고, 그 다음에는 8월 초 홍대 인디스페이스에서 열기로 한 영화 『남태령』 단체 관람을 홍보하느라 분주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들이 모인 디스코드 서버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접주들의 소식이 올라왔다.
운동 선배들과 대화하고 이야기 듣고 싶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지난해 봄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민주주의와 깃발> 전시 개막식에서 본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윤석열 퇴진 광장을 지켰던 깃발들과 응원봉, 각종 기록물 및 사진 작품 등을 전시한 자리였다. 행사를 마치고 아홉 살 어린이부터 머리 희끗한 ‘민주화운동 세대’ 관람객까지 다양한 참석자가 함께 사진을 찍는데, 아무리 해도 구호가 통일되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여러분 각자 외치고 싶은 것 외치세요!”
사진 찍는 분이 쿨하게 소리쳤고, 각자 주먹을 들어 보이며 자신의 구호를 외쳤다. 온갖 소리가 섞여 알아들을 수 없는 구호들이 장내를 울렸지만 다들 유쾌한 표정이었다. 그 장면이 너무도 인상 깊어 여태 잊히지 않는다. 어쩌면 새로운 세대의 운동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단적으로 보여주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긴급조치 세대, 서울의 봄 세대, 87 세대가 이 장면의 인물들에게 부디 지혜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들을 그저 기특하거나 신기하게 여기지 않고, 동등한 민주사회의 일원으로, 운동 ‘동지’의 한 사람으로 존중하면서. 그들은 마음을 열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다.

임은경_ 대학 졸업 후 인터넷 신문 ‘민중의소리’ 기자로 일했다. 남보다 조금 더 잘하고 가장 즐겁게 하는 일이 글쓰기여서, 아무래도 이것이 평생의 업이 되지 싶다. 저마다 다양한 사연을 안고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에 깊은 관심이 있다. 2014년부터 2020년까지 김상진기념사업회에서 선구자 편집주간을 맡아 선구자 발행과 인터뷰 [임은경이 만난 사람]을 연재했다. 2025년에 남태령에 참가자들을 인터뷰한 저서 『그날은 못 갔는데 오늘은 가야겠다-엑스 세대와 엑스 쓰는 세대가 함께 쓴 광장 연대기』를 집필했다. (atree12fly@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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