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삼 농경제 79
#장면 1.1
“오 선생, 순대국이나 먹고 갈까?”
“예! 좋습니다.”
백 선생님이 넌지시 꾄다. 백 선생님은 내가 참여하고 있는 시니어 일자리의 짝꿍(?)으로 나보다는 열 살 정도가 많으니까 70대 후반이면서도 열의가 넘치시는 분이다.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사업단은 <시니어 점자사업단>이라 하여 ‘묵자(墨字) 도서’(비장애인이 눈으로 읽는 일반 인쇄 글자 도서)를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 도서로 번역하는 작업을 한다. 그런데 시니어 일자리의 특성상 다양한 삶의 경험을 가진 분들이 이 사업단에 참여를 하다 보니, 기본적인 직무연수를 거쳐도 각자의 업무 역량의 차이에 따라 점역과 교정에 오류가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소위 ‘짝꿍’을 만들어서 각자의 부족한 부분을 메꿔나간다.
개인적으로는 점자 사업단 사업은 무척 즐거운 업무에 속한다. 그동안 각종 기한 사업과 성과 평가에 시달려야만 했던 일들과 달리, 시니어 일자리는 노인들에게 일자리와 사회활동을 지원하는 차원에서 제공되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결코 실적을 위해서 업무 강도를 높이려는 관리자의 재촉이 없다. 아니 오히려 “어르신들, 무리하지 마시고, 천천히 하세요.”가 담당자들의 주문사항이다. 게다가 하루 근로시간이 3시간에 불과해서 여가 시간도 충분하다.
물론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나라의 노인빈곤율이 OECD 국가 중 독보적인 1위(약 30~40%대 수준)를 기록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즉, 1988년에야 비로소 도입된 국민연금으로 현재 노인 세대의 가입 기간이 짧아 수급액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다, 그마저도 부담금을 미납부한 사각지대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층적 노후 소득보장 체계의 내실화를 위해서는 공적 연금을 개혁해서 낮은 실질 소득대체율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시급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최저임금 수준의 단시간 일자리는 이 부족한 생계비를 보충하기 위한 노인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지가 되고 있다.
따라서 정년에 도달한 노인들의 계속 고용 및 정년 연장을 법제화하기 위한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노인들이 그동안 해왔던 주된 일자리에서 더 오래 일할 수 있도록 하고, 퇴직 후에도 계속고용제도를 통해서 재고용될 수 있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즉, 이를 통해서 ‘편하게 쉬는 노후’에서 ‘일하는 노후’로의 생활방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정부가 재정을 지원하는 공공형 일자리(사회활동지원사업 등)가 지금과 같이 단기적으로는 생계유지에 도움이 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노인 일자리 사업의 질적 개선을 통해서 시장에서 지속 가능한 고령자 일자리를 체계적으로 육성하여 은퇴자들의 전문성을 사회적으로 재활용해야 한다.
#장면 1.2
“그럼 아내에게 잠깐 전화좀 할게요.”
“응, 당연히 그래야지.”
‘Starry, starry night, Paint your palette blue and gray’(아내의 전화 벨소리)
“난데, 백 선생님과 점심 먹고 들어갈게.”
“알았어. 근데 술은 먹지 마. 점심 먹고 갈 데가 있어.”
“알았어.”(전화를 끊는다)
“선생님, 아내가 술은 먹지 말라네요. 운전해야 한다고.”
“오호~ 그래? 그럼 술은 먹지 말아야지. 운전할 거면 술은 입에도 대면 안돼.”
“네, 그럼 저는 밥만 먹는 거로! 선생님은 한 잔 하세요.”
“그래, 집사람 말을 잘 들어야 돼. 그래야 편해. 우하하하하”

<사진> AI로 제작한 사진입니다.
#장면 2.
(KBS의 <여섯시 내고향>, 리포터가 고령의 부부에게 말을 건넨다)
리포터 : 두 분은 얼굴도 똑 닮으시고, 아주 사이가 좋아 보여요.
할매 : 아휴~~ 이 사람 말도 말어. 젊었을 때는 속 엄청 쎅혔어.
할배 : ……(멋쩍게 웃기만 한다)
할매 : 아주 지집질도 엄청났어.
할배 : 뭔 소리여!
리포터 : 후후후. 두 분은 다시 태어나도 함께 사실 거에요?
할매 : 음메, 징글맞네!! 딴 사람 하구두 살아봐야제.
할배 : (주눅 든 표정으로)난 임자랑 같이 살 건데.
리포터 : 후후후. 그러시지 말고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한 말씀해주세요.
할배 : 임자, 그동안 나땜시러 고생 많았제. 내가 늘 고맙게 생각혀.
리포터 :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뽀뽀 한번 해주세요.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볼에 멋쩍게 뽀뽀를 한다. 할머니도 싫지 않은 표정이다.)
#장면 1.3
“정말 젊을 때는 쏘주를 빡스 채 갖다 놓고 밤새 먹었어. 그렇게 먹고 인사불성이 돼도 꼭 집에는 들어갔다니까.”
“오~~ 그래요? 대단하시네요.”
“근데 이젠 못 그래. 술이 나를 이겨버리니까 안되더라고.”
할배들의 대화에서 아주 흔하게 나오는 장면들이다. 젊은 시절 제아무리 개차반으로 술 먹고 분기탱천하던 사람도, 혹은 천하에 난봉꾼도 웬만큼 나이가 들고 힘이 빠지고 나면 어느새 아내 말에 자연스럽게 복종하는 순둥이가 되곤 한다. 나의 경우도 아내에게 자주 듣는 말 중의 하나가 “마누라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는 말인데, 젊어서는 앙바틈이라도 하련만 이제는 그저 순순히 받아들인다. 오죽하면 “늘그막 아내는 첫사랑보다 낫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천하를 호령할 것 같았던 사람들도 황혼에 접어들고 나면 옆을 지켜주는 아내만큼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가 없음을 느끼곤 한다.
그러니 전 세계의 ‘마누라’들이여! 오늘을 즐기고, 조금만 더 기다려보시라. 그 잘난 ‘사나이 대장부’들이 곧 당신 품 안으로 기어들어올 테니까.
그리고 최후의 승리자는 당신들이니까.
오정삼_젊은 시절 학생운동, 노동운동에 투신하였으며 결혼 후 40년 가까이 서울시 강북구 주민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사)삼양주민연대 사무국장, 삼양동청소년아지트 센터장 등을 역임하다 퇴임하였고, 현재는 ‘교육을 생각하는 시민모임’의 회장으로서 민관학 거버넌스를 바탕으로 ‘더불어 현재를 즐기고 미래를 여는’ 청소년 교육활동을 전개하고 있다.(baroac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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