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진 편집위원

농가정학과의 막내로 치열한 고민과 발로뛰는 열정 끝에 현장을 선택하고 사업실패 속에서도 농업이 나아갈 길을 찾는 94학번 안병한(유한회사 한터 대표) 회원의 삶의 이야기를 들었다. 농업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농촌현장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농업전문 기자가 되고 그 초석으로 생산자 중심의 농업카르텔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김상진 열사의 고민을 현재의 삶에 녹여내고 있는 모습을 보며 다시 김상진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삶을 서면 인터뷰를 통해 전한다.<편집자 주>
먼저 간단한 자기 소개를 부탁한 질문에 안병한 대표는 학창시절 활동 소개한다.
사리진 농가정학과… 영원한 막내
저는 농가정학과 94학번 안병한입니다. 아직 마음은 대학에 입학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몸이 여기저기 삐걱거리는 때가 됐습니다. 사실 어딜 가든 막내를 해야 할 나이는 아닌데, 어쩌다 보니 지난 10여 년간은 거의 막내로 살았습니다.
저보다 윗 선배님들은 제가 농가정학과 출신이라고 소개를 할 때마다 놀라시기도 합니다. 어, 거기 남학생도 다녔나? 네, 94학번 동기에 남학생이 5명이었고, 덕분에 군대 제대 후 학교를 다녀야 하나 고민하던 91학번 선배 2명이 저희와 함께 학교를 다니며 졸업을 했습니다.
95학번부터는 더 많은 남학생들이 들어왔는데, 안타깝게도 학부제로 전환되면서 생활과학대로 통합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농가정학과의 마지막 졸업생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총동창회에 가면 늘 막내입니다. 선배님들이 반갑게 맞아주시긴 하는데, 이미 머리가 반백인 막둥이가 늘 좋은 건 아닙니다. 지금은 전북 정읍시에서 농촌개발컨설팅을 하고 있는데, 시골동네다 보니 아직 10년은 더 막내노릇을 해야 후배가 들어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학창 시절, 3만 원으로 출발한 인생 여행
1994년 봄, 관악 캠퍼스는 늘 화창했습니다. 신입생에게 3월은 그냥 천국이었죠. 입학식을 하기 전부터 선배 하숙집에서 술 마시며 놀다가 입학식도 못 가고, 그 핑계로 선배들과 또 술을 마셨던 기억이 아직도 또렸합니다. 사실 2지망으로 농가정학과에 입학하면서 정신없이 보낸 3월이 지날 때쯤 나 자신의 정체성에 물음표가 생겼습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그날 밤 곧바로 청량리역으로 가 서울에서 가장 멀리 가는 마지막 기차를 찾았는데, 바로 장항역이었죠. 추억의 비둘기호 열차, 새벽에 장항역에 내려 그때부터 서해안을 따라 서울로 올라오면서 하나둘 생각을 정리해 나갔습니다. 그때 주머니에 가지고 있던 3만 원으로 출발한 인생 여행이, 일주일이 넘도록 이어졌습니다. 그 시절만 해도 여기저기 밥을 사주시는 분들도 많고, 히치하이킹을 하면서 이동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여행 내내 생각을 정리한 노트가 1권, 그 노트를 들고 다시 학교로 갔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이 없어도, 내가 만들어갈 미래에, 인생에 좀 더 과감히 뛰어들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아마 그 여행의 답이 다른 것이었다면 지금쯤 저는 또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학교에 돌아온 이후, 정말 ‘미친놈’처럼 살았던 것 같습니다. 내가 하고 싶거나,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들은 다 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강의실보다는 학생회실이, 전공 서적보다는 대자보와 플래카드가 내 삶의 중심이 되었지요. 특히 그 시점이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타결될 시점인데, 그 당시 구호가 ‘UR(우루과이라운드)협상 반대, 600만 농민 생존권 보장’이었습니다. 구호 속 농민이 600만 시대에서 30여 년이 지난 지금은 200만 시대로 변했습니다. 그렇게 세상의 변화와 함께 우리의 고민도 켜켜이 쌓여가는 듯싶습니다.
대학생활은 농대 학생회와 풍물패 두레로 가득 찼었습니다. 그곳엔 고민도 있었지만,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토론도 있었고, 거대한 담론에 짓밟히지 않으려는 청춘들의 몸부림도 있었습니다. 그때 그 충만함이 아직 내 삶의 힘이 되곤 합니다. 아직도 그런 생각으로 사느냐는 가족들의 핀잔도 있지만, 그곳에 서 있는 나를 바라볼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제가 두레 26기인데, 벌써 58기 후배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몇 남지 않은 농대 동아리지만, 두레가 조만간 환갑잔치를 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삶의 전환. 안양사랑청년회
그렇게 나의 학창 시절이 마무리되었지만, 아직 군대도 가지 않았던 그때 상황은 여전히 학생회실이라는 나만의 아지트에서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첫 발을 뗀 곳이 바로 안양이었습니다. 안양사랑청년회라는 새로운 공간이 세상으로 가는 나의 첫 문을 여는 열쇠였는데, 불과 3개월 만에 나를 비롯해 3명의 신입회원을 제외한 모든 회원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매일 내가 해야 할 일이,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나를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국가보안법철폐와 구속자 석방을 위한 대책위가 꾸려졌고, 석 달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안양역 광장과 서울 경기지역 곳곳에서 집회를 열었습니다. 다행히 지역의 많은 단체들과 선배들, 학생들의 적극적인 지지는 지금도 안양사랑청년회가 지역에서 존중받는 청년조직으로 남아있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안양사랑청년회가 탄압을 받은 이유는 그 당시 안양지역 곳곳에서 진행되던 재개발촌의 철거민들과 연대하며, 아이들과 공부방 등을 운영했다는 이유였습니다. 당시 사회 기득권 세력이 ‘이적’이라 규정한 그 활동은, 기득권이 돌보지 못하는 세상을 향한 연대의 손길이었던 것입니다.
현재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묻는 질문에 ‘우리가 가는 길이 새로운 농업의 방향이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 그 신념을 이루기 위해 농업전문기자가 되어 농촌현장을 누비며 생산자 중심의 농업카르텔을 만드는 초석을 다졌다.
다시 농업으로, 생산자 중심의 카르텔 구축을 위해
‘농대를 나왔으니 농업을 해야 한다’가 아니라, 우리가 가는 길이 새로운 농업의 방향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그때부터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는데, 핵심은 생산자 중심의 카르텔을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거대 자본이 만들어가는 카르텔이 아니라 생산자가 적정 가격과 시장질서를 지켜가는 카르텔을 만들 수만 있다면, 수많은 농업문제의 해답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농촌현장에 가장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직업으로 농업전문 기자가 되었습니다. 기자의 삶은 늘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내가 바꿔가는 작은 세상이 있다는 것은 충분히 만족할 만한 삶이었고, 그렇게 15년이 이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지방시대를 열었던 노무현 정부시절 저는 한국농어민신문 국제부에서 전남취재본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사실 억지로 떼를 쓰듯 내려간 곳이 전라도입니다. 현장 속에서 보다 치밀하게 생산자 중심의 농업카르텔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었는데 10년 이상이라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렇게 신문사를 그만두고 2015년 시작한 첫 사업이 ‘블랙커런트 품목조직’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기존 품목의 경우 기득권층과 생산자가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어 조합을 결성하는 것이 힘들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블랙커런트를 조직배양해 무병묘를 보급하고, 재배에 필요한 비료를 직접 생산해 생산농가에 반값에 공급했습니다. 그렇게 1년 만에 150여 농가를 조직해 생산부터 수매, 가공, 유통을 일원화하는 데 성공했으나, 사업은 폭삭 망했습니다. 최종 제품이 목표치의 10%도 팔리지 않은 것입니다. 농민들과 약속한 수매대금을 정산하고, 가공비용 등을 떼고 나니 빚만 수억 원의 재고품만 창고에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일순간 파산의 위기가 왔고,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 농촌개발컨설팅입니다. 2005년부터 정부는 해마다 약 1조 원의 예산을 들여 다양한 형태의 농촌개발사업을 추진 중인데, 여타 농업정책과 비슷하게 정책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기자로서 현장을 뛰어다니고, 농민들과 함께 했던 그 마음으로 시작한 농촌개발컨설팅은 저를 농가정학과에 입학하던 1994년으로 다시 데리고 갔습니다. 사실 농가정학과가 생활과학대와 통폐합된 데에는 시대의 변화도 있었겠지만, 90년대 농업이 천대받으면서 학과의 미래를 개척하지 못했던 부분이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농가정학과가 사라진 자리가 토목이나 도시계획, 경제, 관광 등으로 채워지면서 농촌주민의 삶보다는 기술적 접근법을 통한 농촌개발이 확대되었고, 그 결과물이 지난 20여 년간에 걸친 실패한 농촌개발 정책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아쉬움이 큽니다.
‘한터’라는 회사를 직원들과 창업하고 뛰어다닌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 다행히 한터의 생각이 수많은 현장에서 받아들여져 지역을 바꾸는 작은 씨앗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농업, 새로운 전략이 농민중심으로 꾸려질 수 있도록
컨설팅은 새로운 미래를 제시할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즉, 현장을 바꿔갈 수 있는 새로운 전략이 농민중심으로 꾸려질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자산이 될 것입니다. 그 미래가 바로 기후환경 변화에 대한 대응입니다.
농업은 환경 의존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 환경의 균형을 급격히 무너트리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농민들이 큰 피해를 보고 있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농업 환경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지만, 통제 가능한 영역에서 좀 더 농민중심으로 바꿔갈 수 있는 분야가 바로 ‘빛(광원)’의 영역인 듯싶습니다.
토양을 대신한 양분이나 온도와 습도 등을 통제할 시설은 이미 고도화되어 있습니다. 물론 빛 또한 대체 가능한 영역인데, 우선 너무나 가격이 부풀려져 있습니다. 현재 상용화된 농업용 LED광원은 빛의 품질이 좋지 않거나, 광량이 적거나, 발열 등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가 명확하며, 이런 문제를 해결한 제품은 1개당 수십만 원에 달할 정도입니다. 비용이 급격히 증가하면 농업생산을 농민이 자본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 또한 매우 필요한 영역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 5년간 투자와 기술개발을 이어온 것이 ‘고방열 PCB’를 활용한 농업용 고출력 LED 보광등입니다. 빛의 품질이나 광량은 물론 발열문제와 무게 등의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면서도 기본 제품대비 원가를 50% 이하로 떨어트리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미 시제품 개발까지 마쳤고, 올 하반기부터는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갈 예정인데, 이렇게 되면 농민들도 더 이상 보조금에 얽매이지 않고 생산에 필요한 제품을 충분히 구입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구매방식도 일반 산업분야처럼 다양화해 접근성을 높일 것입니다. 품목별 카르텔이라는 꿈은 잠시 접어두었지만, 농업용 고출력 LED가 농업의 새로운 지형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학창 시절, 그리고 졸업한 후 “김상진”이라는 인물이 본인에게 어떠한 상징으로 남아있는지 물었다.
다시 김상진
김상진 열사가 살았던 삶을 벌써 두 배나 살아가고 있지만, 열사의 고민을 얼마나 실천하며 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입학했을 당시 김상진은 우리가 기억하고 함께 지켜가야 할 민주주의의 근간이자 뿌리였습니다. 4월이 되면 학생회를 중심으로 추모제 열기를 더했고, 김상진 열사가 남겼던 외침을 함께 고민하고 배우는 시기였습니다.
그렇지만 졸업 이후엔 좀 더 먹고사는 문제에 삶의 가치를 두고 살면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등한시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70~80년대 의식의 진보가 사회의 진보를 이끌던 시대를 지나 2000년대 기술의 진보가 사회 진보를 이끌고 있는 현재, 90년대 학교를 다닌 우리는 세대와 세대를 잇는 다리가 되기도 하지만, 세대와 세대 사이에 낀 모래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90년대 학번이 세대를 잇는 씨줄이 되고,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의 가치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날줄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다시 김상진’이라는 거대 담론을 현실 속에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농생대 풍물패 두레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묻는 질문에 후배들의 치열한 고민과 열정에 선배들이 자연스럽게 밀려나면서 김상진 열사의 정신이 구현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1975년 그리고 2026년
제가 대학에 입학한 1994년은 X세대라 칭하는 별종들이 출현한 해입니다. 아날로그 세상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다녔지만 디지털로 바뀌는 기술혁신의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융합을 이끈 이 세대는 10년 주기로 바뀌는 세상의 권력을 20년 이상 장기집권하는 대표적인 ‘꼰대’ 세대이자 기득권이 되었습니다.
그런 X세대가 태어난 게 1975년, 바로 김상진 열사가 목숨을 던져 잉태한 후배들이 태어난 거죠. 그러하기에 X세대에게 김상진 열사는 그 자체로 존재이며, 혁신이며, 지켜야 할 가치입니다.
그런 X세대가 지난 자리가 M(밀레니얼)세대와 Z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후배들의 눈엔 X세대조차 혁신의 대상일 수 있으며, 극복해야 할 산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도전이 좀 치열했으면 좋겠습니다. 열정적인 후배들에게 자연스럽게 밀려나는 선배의 모습, 이것이야말로 김상진 열사가 말했던 가장 민주적인 혁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미친 듯이’, ‘내일이 없는 인생처럼’ 오늘의 청춘을 불태우는 열정이 있다면 ‘못 이룰 미래’ 따위는 없을 것입니다. 밤새 막걸리를 기울이며 꽹과리와 장구를 치던 1990년대 상록캠퍼스 두레 동아리방의 열정은 아직 유효하니까요.
12.3 내란사태 이후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복원력과 김상진 열사의 연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내란의 밤이 민주의 밤으로
2024년 12월 3일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는 내란수괴 윤석열의 담화문은 일상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급급했던 민중의 삶을 다시 한번 광장으로, 민주의 바다로 이끌기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김상진 열사가 그토록 쟁취하고자 했던 민주주의 프로세스는 비정상을 정상으로, 권력을 쥔 대통령조차 민중의 힘으로 정화할 수 있는 제도와 힘을 보여줬습니다.
민주의 가치는 이제 독재를 넘어 이 사회를 지켜가는 근본이자 삶 자체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독재에 항거하며 투쟁적이던 모습과는 다르지만 열사의 구호는 이미 우리 모두의 삶이 된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지켜가야 할 ‘청년 김상진’의 혁신적 가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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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세진_ 숭의여전 문창과에 입학, 문예창작보다 학보사 기사를 더 열심히 쓰고, 졸업 후 전국연합 기관지‘민’,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신문 ‘건치신문’ 만드는 일을 하였다. 이후 성공회대 사회학과에서 공부하고 KOICA 봉사단을 다녀온 후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을 인터뷰하고있다. (sejin3025@hanmail.net)
Last modified: 2026-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