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권 <1975·김상진> 감독, 김상진 열사 50주기 기념사업 준비위원장, 농생물 79
요즘 생각을 바꿔 먹는 중이다. ‘수동에서 능동’으로… 아니다. 틀렸다.
‘수세에서 공격’이다. 지난 3월 31일 백범기념관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출간 기자회견이 열렸다. 진실·기록TV(4명)는 그 역사적 현장을 다양한 시선으로 기록했고, 영상에 담았다.
행사장에서 여러 사람들과 명함을 주고 받았다.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진실·기록TV는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요?”
“‘국가폭력피해자 기록물 저장소’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김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온몸에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았다. 국가폭력 가해자들을 역사의 심판대에 올리는 전환점을 맞이한 기쁨이리라. 내 인생 또한 커다란 물줄기가 출렁이는 느낌이 들었다.
기억하지 않고, 시대의 고단함을 서로 나누어지지 않는 역사는 그 아픔을 치유할 수 없다. 국가폭력의 발생에 대하여 지금까지는 수세적 패턴으로 ‘감당하기’, ‘대책회의’, ‘분노’, ‘집회’, ‘원인 규명’, ‘호소’, ‘하소연’, ‘홍보’와 같은 개념에 머물렀다. 하지만 앞으로는 가해자들 이름을 한놈 한놈 불러 세운다. 그들이 저지른 구체적인 악행과 함께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서 단죄하는 일, 그 일이 새롭게 내 삶 결로 들어오고 있다.
나는 79학번이다. 70년대 마지막 학번으로 60대 중반을 넘어 인생 종반부로 넘어간다. 정리해야 될 것들이 많은 시기에 결이 다른 새로운 일을 맞이하는 중이다. 내가 즐겨할 수 있는 일이기에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감당할 생각이다. 지치지 않고 풀어나갈 수 있는 동력을 얻어가는 시점이라 뿌듯하기도 하다. 이야기로 가해자들을 단죄하는 일이다. 나이가 들어 물리적으로 어려워지면 같이 움직인 젊은 동료들이 그 일을 이어갈 것이다.
최근 7년간
고단했지만 즐겁고 유쾌했다.
2019년, 김상진 열사 다큐멘터리 영화제작 선언을 하고 3년 반에 걸쳐서 제작자겸 감독으로 일했다. 코로나 시기와 맞물려 우여곡절이 많았다. 제작진은 김상진형에 대한 의미 있는 기록들을 남길 수 있었다. 제작을 마치고 국제다큐영화제에 출품하고, 2년 동안 전국 18개 지역을 돌면서 시사회와 공동체상영회를 진행했다.
여러 아쉬움이 남는 여정이었지만 ‘열사의 지향’을 영상으로 기록했다는 측면에서 만족한다. 뒤이어 예기치 않게 2024년 초 ‘김상진 열사 50주기 기념사업 준비위원장’으로 위촉받아 1년 반 준비해서 2025년도에 50주기를 역사의 한 장면으로 기록했다.
1979년도 봄, 관악에서 교양과정 1년을 지낼 때였다. 수원캠퍼스에 내려와 버드나무 낭창낭창 대강당 잔디밭에서 4년 전에 있었던 김상진 열사의 옹골진 삶과 할복의거 얘기를 들었다. 그 이후로 40여 년, 형님의 뜻을 따라 소신껏 살아왔다. 영화 만들면서 동료·선·후배들 인터뷰하고, 관련한 사람들 만나고, 가족들과 이야기 나누면서 점점 더 분명하게 각인이 된 게 있었으니 ‘민주주의의 필요충분조건’은 ‘기록’이라는 것이었다. 기록되지 않는 역사는 흩어지게 마련이고, 그 뜻을 나눌 수가 없다.
그때 제작진을 꾸렸다. PD 2명, 작가 2명, 감독인 나까지 5명. 40대 초중반의 방송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가들이었다.
우리는 영상기록의 중요성을 공감했고, 향후 할 일 또한 ‘기록화 사업’이라는 명제가 가슴속에 새겨졌다. 그 무렵 성공회대 평화박물관 한홍구(서울대 국사 78) 교수팀과 인연이 되었다.
국가폭력 강제징집·녹화공작피해자
나는 1981년 학내시위 사건으로 1년 무기정학 당했고, 82년도 2학기로 1년 만에 복교했다. 한 학기를 넘기고 그다음 해인 1983년 6월 8일, 다시 학내시위를 기획했다는 죄명으로 다음날 서둔동 자취방에서 긴급 체포되었다. 수원경찰서 보안분실에서 4박 5일 조사받고 13일, 철원 백골 3사단으로 강제징집되었다. 그 무렵 강제징집·녹화과정에서 친구 한희철 등 여러 열사들이 죽음으로 내몰렸다. 열사들의 희생으로 나는 생존해서 돌아왔다.

그리고 2019년부터 강제징집·전향·프락치강요 공작 피해자들과 함께 단체를 꾸려서 활동하고 있다. 그 인연으로 평화박물관 한홍구 교수팀과 제2기 과거사진실화해위원회 용역에 참가하여 전국에 있는 강제징집피해자 및 유가족을 채록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2024년도의 일이다. 전국 3천여 명의 피해자 중에서 보안대 존안카드가 남아있는 100여 명 채록을 진행했고, 용역을 마치고 난 이후에도 2005년까지 150여 명의 삶을 영상으로 남겼다. 2026년도 현재 진행형이다.
강집피해자들은 국가배상 소송에 참여하여 승소하기 시작했다. 나오는 배·보상금 중 5%를 기금으로 모아서 ‘국가폭력 기록화 사업’을 계속해 나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김상진 영화 제작팀 전원을 영상기록팀으로 꾸려서 그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팀이름을 ‘진실·기록TV’라고 붙였고 최근에 기록장소로 유튜브도 개설했다.
대상은 강제징집·녹화공작 피해자와 의문사 유가족뿐만이 아니라 국가폭력으로 희생된 피해자 및 관련자들이다. 세월이 너무 많이 지나 피해자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분들의 ‘한’을 영상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촌각을 다투는 문제다. 그렇게 국가폭력을 채록하고, 다양한 콘텐츠로 표출하고, 다큐멘터리로 구현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에 의해 자행된 재일동포 관련 간첩단 사건들이 전부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간첩단 조작사건 당사자와 피해자 가족들을 채록하고 있다. 그들을 기록하다 보니 제주 4·3과도 한 몸으로 연결된다. 국가폭력은 악랄했다. 하여 동시에 ‘민간인 학살’ 관련한 사안들도 연결되어 채록하고 있다. 우리 팀은 지난 12월에는 일본 동경에 다녀왔고, 4월 초에는 4·3 일정에 맞춰 제주도에서 간첩단조직과 4·3학살 현장을 촬영했다.
단기적 목표
장편다큐멘터리 2편을 제작 중이다. 군 의문사 김용권 열사 어머니 박명선 님과 군 복무 중 보안대에 끌려가 한 달여 모진 고문 끝에 온몸과 영혼이 만신창이가 된 장희수 씨 어머니 김경자 님을 3년간 연속해서 기록했다. 장희수 씨는 고문 트라우마로 실명에 뇌경색, 깊은 우울증과 치매 상태로 평생 어머니의 돌봄을 받다가 작년 12월에 6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두 어머니를 모티브로 상반기에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출품 예정이다.
또 한편은 재일동포간첩단 사건과 4·3을 다룬 장편 다큐멘터리다. 내년 상반기 중 완료를 목표로 동시에 부지런을 떨고 있다.




국가폭력 피해자 관련 행사들 기록을 촘촘히 하고 있다. 국가폭력에 의해 아프고 절절했던 상황들을 기록하면서 마주치는 무게감들이 있다. 동 시점으로 ‘역사는 기록이며 가해자는 반드시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이를 악문다. 그리고 기록된 증거들을 모아 국가폭력을 자행한 자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서 이름을 부르고, 공격하는 것이다. 쭈뼛거리거나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역사의 심판대’에 올린다. 그 어느 누구도 다시는 그러한 일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맺는말
진실·기록TV 유튜브에 ‘The김상진’ 공간을 만들어 ‘김상진 열사 기록과 콘텐츠’를 별도로 생성·관리하고 있다. 이 공간에 다큐 제작과 50주기 기념사업 준비과정에서 얻은 자료를 기반으로 생성되는 스토리들을 넣어두고 있다. 훗날 김상진 열사 공식 아카이브 공간이 만들어질 때까지 지속할 생각이다.
“전두환이 안방에서 죽었기 때문에 윤석열이 나왔다.”
「반한법행위자열전」 출간 기자회견장에서 나온 말이다.
한명 한명 국가폭력 사건과 가해자들의 이름을 부르는 일
또박또박 그들의 죄를 명토 박아 역사의 심판대에 세우는 일.
상진형님의 말씀처럼 ‘저 위대한 조국의 민주주의 승리’가 도래할 때까지
역사의 법정에서 ‘저들의 생사여탈권’을 우리가 쥔다.
열사의 ‘뜨거운 갈채’를 위하여
민주주의 만세!
김상진 열사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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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권_ 이야기농업연구소장, 농생물 79, 인문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농민들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으로 홍보하는 것을 돕는 ‘이야기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2007년 『도시와 통하는 농촌 쇼핑몰 만들기』, 2011년 『이야기 농업』, 2015년 『스토리두잉』 등 세 권의 책을 펴냈다. (ecenter@naver.com)
Last modified: 2026-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