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10:39 오후 141호(2025.08)

[선구자 인터뷰]
다시, 봄은 왔으나 우리에게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_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임세진 편집위원

<선구자>에 ‘인물로 보는 근현대사’를 연재하고 있는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이 저서 『다시, 봄은 왔으나-인혁당재건위 사건 사형수 8인의 약전』(삼인, 2025)을 출간했다.

이창훈 씨는 2011년부터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으로 일하면서 박중기 선생, 시노트 신부, 권양섭 선생, 박정기 선생, 권재혁 선생 등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의 전기 자료집 백서 등을 펴내는 일에 참여하였으며, 2015년에는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김학민ㆍ이창훈 공저), 2020년에는 『김말룡 평전』를 펴냈다.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으로 『다시, 봄은 왔으나-인혁당재건위 사건 사형수 8인의 약전』를 내기까지의 과정과 앞으로의 계획을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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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적지는 홍천, 태어난 곳은 평창 그리고 어린 시절을 제천시 송학면에서 보낸 그는 대학에서 이 일과 너무 연관이 많은(웃음) 지리학을 전공했다.

“제 책을 보면 서두가 그 동네 산이 어떻고 물줄기가 어때서…. 이렇게 시작해요. 이게 바로 저의 지리적인 냄새가 나는(웃음) 부분이죠. 작가한테는 글을 ‘시작’하기가 제일 어려워요. 소설도 보면 첫 구절이 제일 중요하지 않습니까? 태백산맥 첫 구절은 너무나도 유명하지 않습니까? 지리산에서 바라보는 남도의 휘황찬란한 빛깔들을 그린 첫문단으로 책 속으로 빨려들게 만들죠. 첫 문단이 쓰여지면 소설도 쓰여지고 시도 쓰여지죠. 성명서도 첫 문장이 어떻게 쓰여지느냐에 따라서 그 글이 잘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가 결정돼요. 전 그 고민을 안 하려고 무조건 이 사람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그 동네에 뭐가 있고 하다 보면 그 뒷얘기가 시작되죠. 지리학과를 나왔기 때문에 그런 게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책이 나오기까지, 여덟 분의 기록과 균형을 위한 10여년의 세월

먼저 어떻게 4·9통일평화재단에 몸담고 작업을 하게 된 건지 물었다.

책에서도 밝혔지만 4·9통일평화재단(이하 4·9재단)에서 이분들의 생애를 복원하는 게 당연히 사료실장으로써 해야 될 일이니까 시작하게 됐죠. 그런데 하다 보니까 한계를 느꼈어요. 여덟 분에 대한 자료를 다 모았는데 창작을 안 하면 도저히 더 쓸 수 없는, 자료를 찾기 힘든 상황까지 왔어요. 그 이유는 책에도 써놨죠. 비밀 활동을 하다 보니까 자료를 남기지 않은 것도 있었고, 그리고 어쨌든 간첩으로 돌아가신 지 30년, 40년이 되다 보니까 자료들이 많이 사라졌고 기억들도 사라졌죠. 그러다 보니까 평전으로 나오려면 나름대로 어느 정도 페이지 분량이 보존돼야 되는데 그 편차가 심했어요. 어떤 분은 차고 넘쳐요. <선구자>에 실렸던 분들은 4편씩 실었는데 미안해서 더 못 쓸 뿐이지, 썼으면 한 10편까지 썼을 거예요. 그 외 분들은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을 가진 사람도 없고, 또 주로 증언하신 분들이 부인들이다 보니까 인혁당과 관련된 과정에서 나타났던 것들은 기억하고 계신데, 결혼하기 전에 남편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자칫하다가는 어떤 분은 분량이 한 300쪽 되는데 어떤 분은 100쪽도 안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어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죠. 그래서 마지막에 분량을 맞추느라고 앞에 사람에게 들어가도 괜찮을 부분을 뒤로 빼서 분량을 채운 부분도 나와요. 그런 과정 속에서 만들어졌죠.

처음에는 작가를 섭외를 해서 창작형 평전을 준비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여덟 분이 되다 보니까 가족들하고 살아남은 동지들의 호불호가 있을 수가 있어요. 만약에 한 분이라면 감내를 할 수가 있는데 여덟 분이다 보니 감당하기가 힘든 거예요. 좋은 뜻으로 냈는데 혹시라도 사회적인 문젯거리가 되면 곤란하겠다는 염려가 있었고요. 그리고 작가를 섭외한다고 해도 한 두 사람이라면 모르겠는데 여덟 사람을 작가 한 사람한테 맡길 수는 없고 여덟 분의 작가를 섭외했을 때 그 감당도 어렵겠다는 판단이 있었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여덟 분 책을 내는 것은 어렵다는 판단을 하고 이후 약전 형태로 출판하는 것까지 이야기가 됐는데 마지막에는 재단 이름으로 낼 것이냐, 이창훈 개인 이름으로 할 것이냐를 고민하게 됐습니다. 내용을 보면 물론 제가 참여했지만 4·9재단에서 다 한 일들이니까, 재단 이름으로 했을 때는 앞에 논의됐던 것과 같은 그런 문제들이 또 생길 거다, 그래서 이창훈 이름으로 내게 됐는데요. 그 시간이 10여 년 흐른 거죠. 원고는 그 사이에 작업이 계속 돼왔고요.
어쨌든 글 작성하는 원고에 대한 내용이 10년이 걸렸으면 더 멋있는 책이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출판을 해야 되느냐 마느냐에 대한 과정이 10년이 걸렸다는 사실이 좀 그렇죠(웃음). 지금 묵은 때가 확 내려가는 것 같아요. ‘아, 내 할 일 다 했다’ 뭐 그런 느낌?(웃음)

4‧9재단의 사료실장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졌다.

제가 경희대 다니면서 총학생회 편집부에서 신문을 만들었는데 87년 6월 항쟁 때 데모를 시작해서 졸업할 즈음에 경희민주동문회에 특채로 입사를 했습니다. 민주동문회 회보 만드는 사람이 그만둔다고 그래서 특채로 입사를 했는데 특채의 내용은 졸업할 때 소속 교수들이 점수를 좀 줘서 졸업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거였죠. 요즘 같으면 말도 안 되는 그런 꾀임에 넘어갔죠. 제가 편집일에 관심이 많았나 봐요. 교회 다닐 때도 주보 만드는 일을 했었거든요.(웃음) 인쇄물에 대한 매력이 있었나 봐요.
졸업하고도 경희민동에서 일하면서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 일도 하고 2008년에 4·9재단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진상규명 운동, 재심 과정 등에 참여를 했었거든요. 재단이 2008년에 만들어지고 2010년부터 한 2년 동안 사업 계획을 준비해서 3억 원 정도 비용을 들여서 50명의 500여 시간 구술을 진행했어요.
어머니들 인터뷰를 담당할, 국가 피해 관련된 여성 연구를 전문으로 하시는 이임하 박사와 한국사 전문가들 2명, 이렇게 박사도 3명 붙여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사업 계획을 세우면서 ‘니가 필요하다’해서 2011년 3월부터 일을 시작했죠.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가 인연이 돼서 4·9재단 일을 시작한 거죠.

49통일평화재단 설립. 통일을 지향했던 분들을 기리는 모임

2007년도에 인혁당재건위사건 재심이 두 번 있었는데 첫 번째 재심이 사형수 여덟 분 재심이었고 그다음 사건 관련자 17분의 재심이었죠. 두 번의 재심 재판이 끝나고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은 어머니들이 일정 금액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내놓으셨어요. 그 금액 일부분은 시민사회단체 지원으로 가고, 제가 보기에 한 10% 정도가 남아서 재단이 만들어진 것 같아요. 4‧9재단은 유족들이 국가로부터 받은 손해배상금 중 일부를 출연한 기금으로 꾸려진 거죠.

명칭에 대해서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죠. 4‧9재단, 4‧9통일평화재단 이러면 잘 모르잖아요. 지금도 4‧19랑 헷갈리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그냥 인혁당재단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는데요. 인혁당이라는 명칭이 세상에 알려지기는 그렇게 알려져 있는데, 실제 우리 이름도 아니고 그래서 그분들이 지향하던 통일‧평화를 넣자고 한거죠.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평화‧통일이라고 그러지 통일‧평화라고 안 그러거든요. 그렇지만 이분들은 통일을 위해서 사셨던 분이다, 해서 통일을 앞에 놓고 평화를 뒤로 놓는 그런 과정들이 있었죠.

처음에 저희가 4명이 있었어요. 사료실장, 조사실장, 사무국이 있었는데 조사실은 진화위(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1기가 끝나고 이명박이 더 이상 못하게 막았잖아요. 그래서 1기 진화위에서 다 못한 거를 4·9재단에서 이어가자고 해서 조사실에 2명이 있었죠. 이후 진화위 2기가 만들어지면서 두 분이 그만두시고 후에 저 혼자 활동을 하고 있다가 얼마 전에 제가 이제 연로해서(웃음) 새로 한 분을 더 뽑아서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추모식과 공모사업, 시민사회단체 사업을 지원하는 49통일평화재단

4‧9재단 사업은 추모식이 공개적인 추모 사업이고요. 그다음에 공모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매년 5천만 원 정도의 돈을 들여서 시민사회단체 사업을 후원하는 사업인데요. 처음에는 되도록이면 많은 단체를 지원하려고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시도만 하고 사라지는 사업들이 많더라고요. 그런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었어요. 물론 그 지원금이 마중물이 돼서 좋은 일을 하는 단체도 많이 생겨났었죠.
장단점이 있는데 한 10년 지나고 나니 좀 의미 있고 큰 사업에 지원을 해보자, 그래서 최근에 했던 것 중에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에서 20년 동안 기록을 아카이브로 제작하는 사업이 있어요. 이름도 자주통일평화연대로 바뀌었잖아요. 그러면서 6‧15단체의 20년 사업을 정리하는 사업 제안이 들어왔을 때 저희가 흔쾌히 받아들였죠. 첫해에는 공모 사업으로 선정해서 천만 원을 지원했는데 그게 천만 원으로 끝날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다음해에는 2천만 원을 지원해서 올해 6월 15일 전후해서 아카이브가 열리는 행사를 가졌죠.

그 외에 ‘감옥 법령집’이라고 있어요. 천주교 인권위원회에서 옥살이하는 분들이 스스로 변호문을 작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을 2, 3년 주기로 발행하는데 그것도 돈이 좀 들다 보니까 천주교 인권위에서 발행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중에 저희가 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2천만 원 지원했죠. 그리고 올해는 청년통일운동을 하는 청년 단체를 키워보자고 해서 진보대학생넷에 그냥 천만 원을 지원하기로 했어요. 원래는 단체에서 ‘무슨 사업을 하는데 돈을 주세요’ 이런 게 정상인 거잖아요. 그렇게 안 하고 ‘우리가 천만 원을 줄 테니까 너희들이 하는 사업들을 좀 풍성하게 해 봐라’ 이렇게 해서 천만 원을 지원했거든요. 그 사업이 성과 있게 끝나면 내년에도 또 지원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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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그리고 가공의 밑바탕이 될 원자료들

오랜 시간 수집해 온 4·9재단의 자료는 어떻게 쓰여질지 궁금해졌다. 아카이브로 공개를 할지, 계속 책으로 출판을 하는 건지 물었다.

그게 원자료라서 바로 작업을 할 수는 없고요. 일단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관련된 백서를 냈고요. 그다음에 이 책처럼 필요한 부분들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고요. 아카이브도 만들려고 그래요. 원래 처음에는 건물을 하나 사서 박물관처럼 멋있게 만들려고 그랬어요. 그런 공간이 필요하긴 한데 비용이 많이 드니까 현실적 어려움이 있고요. 온라인으로 할 수 있는 아카이브를 하려고 하는데 그것도 비용이 많이 드네요. 지금 기획비만 한 천만 원 정도 예상하고 기획하고 설치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카이브는 그동안 모아왔던 자료들 중에 공개할 수 있는 자료들을 전시하고 나머지는 앞으로 계속 이런 책을 만들어내는 기본 자료로서 활용될 수 있도록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공개할 수 없는 자료들도 많은 건지 물었다.

그건 여러 가지예요. 구술하신 분이 비공개를 요구하는 부분들도 있고요. 그리고 우리가 구술을 진행했을 때 시점이 사건으로부터 한 30년이 지나고 당사자들이 70대, 80대 초반일 때였어요. 그러다 보니 기억에 혼선이 있어요. 그래서 그대로 발표를 하면 사람들한테 오해를 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감없이 이야기하는 과정 속에서 다른 분들에 대해서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얘기하다 보니까 당사자들이 보면 힘들어하실 내용들도 있어요. 그래서 구술자료를 완전히 공개하는 건 불가능하고 가공을 해야 될 것들이 있죠.

<선구자>와의 인연, 책 발간의 큰 역학을 한 <선구자> 기고

<선구자>를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인물로 보는 근현대사’를 기고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아시는 대로 김상진 열사가 인혁당 사형 집행 후에 분개해서 할복하셨잖아요. 제가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 일할 때 운동이 막 활성화되던 시기라 김상진기념사업회와 연을 갖고 뭔가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 서울대 농대 민주동문회 분들도 자주 만나고 그랬죠. 그러던 중 <선구자> 쪽에서 현대사와 관련된 연재 글이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연재를 하게 됐죠. 지금 한 7년 정도 된 것 같은데요. <선구자> 장점이 3개월마다 한 번씩 나오니까 원고 작성 시간이 좀 여유가 있어요. 다른 매체는 대부분 한 달 남겨놓고 써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열사나 역사적인 인물을 그렇게 함부로 쓸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대단히 힘이 들어요. <선구자>는 3개월 전부터 요 분을 쓸 건데 어떤 내용을 담아야 되겠다, 이런 걸 계속 고민하고 그 고민 속에서 글이 쓰여지다 보니까 그래도 나름대로 조금 완벽한,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용이 좀 있게 된 거죠.
그 덕분에 정말 용기가 생긴 거예요. ‘<선구자>에 실은 정도 내용이면 출간해도 되겠구나’ 이런 자부심을 심어준 거죠. 그러면서 인혁당 이분들도 이야기도 이렇게 쓰면, 약전 정도면은 <선구자>에 쓰던 원고 정도의 분량이니까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쓰겠습니다’ 이런 것도 있어요. 그래서 이 책 『다시, 봄은 왔으나-인혁당재건위 사건 사형수 8인의 약전』이 나오는데 <선구자>가 정말 큰 역할을 해 주셨습니다.

인혁당의 대중화, 유명 작가들의 작업이 이뤄지길

앞에서도 잠깐 얘기했지만 재단 이름으로 내면 책이 팔리지가 않아요. 저는 재단 이름으로 책을 내는 것보다 개인이, 책이 많이 보급될 수 있도록 유명 작가가 붙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사람들이 와서 우리 인혁당을 소재로 시도 좋고, 책도 좋고, 영화도 좋고, 다양한 걸 좀 많이 내주길 바라죠. 예전에 박찬호 감독이 영화를 만들어 보겠다고 해서 저희 가지고 있는 자료도 주었거든요. 그리고 우리 경희대 시인 선배님, 이산하 작가가 자료를 받아갔는데 아직도 책이 안 나왔어요.(웃음) 그 시점이, 이산하 씨가 제주 4·3을 다룬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했다가 감옥에 갔었거든요. 이후 책을 낸 지 몇 년 기념해서 재출간하고 기념식을 해서 다시 막 떠오르고 신문지상에 이산하라는 이름이 회자되던 시점이에요. 당시에 인혁당 연작시를 써보겠다고 그래서 자료를 다 줬었죠. 그 외에도 몇몇 유명한 분들이 있어요. 알 만한 분들이. 근데 그분들은 지금도 계속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웃음) 안 나와서 그렇지, 그런데 한 번 나오면 대박이 될 수 있는 분들이에요. 책을 준비하는 분도 있고요.

하여튼 저는 단체 이름보다는 유명 인사들이, 대중들이 많이 접할 수 있게 다양한 형태로 작품이 만들어줬으면 하고요. 저도 틈바구니 끼어서 계속 책들을 내고 싶어요.

앞으로의 계획, 죽을 때까지 계속될 집필

이 책의 처음 제목이 ‘춘래불출래(春來不出來)’였는데 제가 ‘다시 봄은 왔으나’를 제안해서 바뀌게 됐죠. 나름 이 책을 읽은 분들이 책 제목을 잘 정했다고 이야기를 해요. 그리고 내란 시점에 나온 책이라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해 주는 분들도 있고요. 어쨌든 인혁당 여덟 분의 일대기가 한 권에 적혀 있으니까 그동안 많았던 혼선도 한 방에 정리되는 것처럼 좋았다, 이런 의미, 장점들이 있다고 설명하는 분들이 있는데요. 하여튼 이 책이 제 한계입니다. 책이 정확하게 기록이 되도록 써야 하는 것이 물론 필요해요. 후대들에게 잘 전달돼서 잘 계승할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한데 요즘은 워낙 책들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정확하게 써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책의 홍수 속에서 대중들이,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서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영화 1987>처럼 좀 쉽게 접할 수 있는 게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최근에 이 책 내고 나서 유명 인사들로부터 몇 번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주 요즘 가슴 뜨겁게 지내고 있어요. 곧 조만간 좋은 결과물들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인혁당과 관련된 작업을 하실 분들이 있으면 저는 얼마든지 무보수로 그분들을 적극 도와줄 그런 계획입니다.

그리고 <선구자>에 실린 글들 중에 책으로 아직 못 나온 것들을 한번 묶어서 내야 돼요. 근데 그건 출판비용 전액을 제가 감당해야 되거든요. 이 책 『다시, 봄은 왔으나-인혁당재건위 사건 사형수 8인의 약전』은 재단에서 좀 사주고, 그리고 인혁당이라는 이름값이 있으니까. 근데 나머지 분들은 정말 이름 없는 분들이잖아요. 그분들 이야기를 담은 책을 내줄 출판사를 만나야 되는데 요즘 출판업계가 워낙 힘들어하고 있기도 하고요. 제가 책을 내는 게 목적이면 100권, 200권이라도 찍어서 내겠지만 그런 건 의미 없는 거고요. 좀 뭔가 의미 있게, 우리 사회를 환기시킬 수 있게 하는 정도가 되면 또 책을 내야 되니까. 그 작업은 계속하죠. 죽을 때까지. 그거 외에는 할 게 없어요.(웃음)

출간 이후 또 다른 기록을 위한 발걸음

개인적으로 <선구자>에 연재한 글들이 엮인 책 발행이 반가운 한편 <선구자> 연재는 중단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들었다. 여덟 분 가운데 <선구자>에 실리지 않은 분들의 이야기가 연재되는 것인지, 앞으로 방향을 물었다.

선구자에 실었던 게 도예종, 이수병, 여정남 편이었죠. 그 세분 이야기는 <선구자>에 싣고 나머지 다섯 분 편은 새로 써서 출간을 했죠. 다섯 분의 내용은 책이 나왔으니까 연재로 실을 수는 없고요. 지금 집필하려는 분이 신향식 선생님이라고 그래도 나름 남민전의 지도 위원급인데 많이 안 알려져 있어요. 자료를 보면 신영복 선생님이나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님이나 등등 뭐 그런 분들의 책에 조금씩 등장을 하는데 신향식 선생님은 베일에 쌓여 있거든요. 그분과 관련된 글이 옛날에 「말」지에 실린 거 외에는 없어요. 그 주변에 계신 분들은 다 돌아가셨고 이제 만날 분이 오병철 선생님이 계시긴한데 오병철 선생님은 연로하셔서 인터뷰하실만한 상황이 안되죠. 그렇다고 예전 글을 선구자에 실을 수는 없고 조금 업그레이드해야 되는데 어떻게 할지 생각하던 중에 이 책을 쓰면서 느낀 게 자식분들도 의외로 많은 이야기들을 알고 계시더라고요. 다만 탄압 과정에서 벌어진 가정사이다 보니까 그동안 얘기들을 안 했는데 아버님 돌아가시고, 그분을 증언해 줄 수 있는 분들이 많이 없다 보니까 이제 증언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신향식 선생님 아드님하고 인터뷰를 약속했거든요. 인터뷰를 마친 다음에 글을 쓰려고 그랬는데 탄핵 때문에 미뤄지다 보니 아직 인터뷰 일정을 못 잡았어요.


이창훈 씨는 현재 4.9재단 사료실장,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으면서 국가보안법 폐지센터, 민주유공자법 제정 촉구 1인시위 참가,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 추진위원회,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해설사 과정 교육 등에 참가하며 인혁당 사건으로 돌아가신 분들 추모제 참가를 위해 전국을 다니고 있다. 바쁜 업무 속에 <선구자> 연재를 계속하는 그에게 김상진기념사업회에 애정이 있음을 짐작해 보며 김기사에 한 말씀을 부탁했다.

김상진 열사를 제대로 기려야 하는 이유

김상진 열사 책이 나와 있긴 한데 자료를 좀 더 보충해서 대중적인 책이 나오면 좋을 거 같아요. 창작도 좀 보태서요. 창작이라고 해서 없는 얘기를 갖다 쓰는 게 아니고요. 그 시대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적다 보면 김상진의 예측된 행동이 표현되지 않겠습니까? 그 당시 이미 밝혀진 행위들이라도 그것을 누가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서 감동이 또 다를 수 있거든요. 김상진을 더 대중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작가들을 섭외해서 김상진과 관련된 책자가 다시 한번쯤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만화책도 해보면 좋을 것 같고요. 물론 그동안 많은 작업을 하셨지만 김상진을 알리는 데 더 애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상진 열사가 우리나라 열사 중에서도 아주 특별하신 분이에요. 죽음의 형태가 특별하기도 하고 그가 남긴 양심 선언문 그 자체도 아주 명문구이거든요. 전태일 기념관 앞에 전태일의 일기를 철판 활자로 붙여 놓은 것처럼 김상진 양심 선언문을 어떤 형태의 조형물로 설치할 수도 있을 거고요. 김상진 양심선언문이 적힌 옷을 제작하는 등 다양하게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을 것 같아요.
또 농민 운동에 상징일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죠. 농민 운동이 농민들만 잘 먹고 잘살면 되는 게 아니라 정치가 제대로 되야지만 농민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상징적인 인물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런 표현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거고요. 수원이라는 도시 안에서 민주열사로서의 모습도 표현할 수 있고요. 그렇게 해서 김상진을 알리는데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우리가 안 하잖아요.
독립운동가들 예를 들자면은 조선일보가 기리는 독립 운동가들이 있거든요. 설악산에 한용운 기념관까지 차려놓고 매년 인제군과 만해축전을 공동주최하며 마치 조선일보가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화신인양 떠벌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김상진을 잘 가꾸고 만들어 놓지 않으면 나중에 보수 쪽에서 ‘김상진이 이렇게 훌륭한 분이야’ 그러면서 자기네들이 가져가서 기리며 이용할 수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김상진을 우리가 잘 키우고 제대로 기려야지 딴 데로 새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잘 관리를 안 하고 정확하게 하지 않으면 후대에서 딴 데로 갈 수도 있다, 그만큼 가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봄은 왔으나-인혁당재건위 사건 사형수 8인의 약전』 표지에 있는 띠지를 제거하면 ‘우리에게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라는 글귀가 숨어있다. 우리의 봄을 위하여 대중에게 다가가는 다양한 형태의 작품이 나오기를 희망하며 끊임없이 고민하는 그의 행보를 보며 대중을 향한 김상진 열사 기념사업의 방향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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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세진_ 숭의여전 문창과에 입학, 문예창작보다 학보사 기사를 더 열심히 쓰고, 졸업 후 전국연합 기관지 ‘민’,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신문 ‘건치신문’ 만드는 일을 하였다. 이후 성공회대 사회학과에서 공부하고 KOICA 봉사단을 다녀온 후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을 인터뷰하고있다. (sejin3025@hanmail.net)

Last modified: 2025-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