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9:01 오후 141호(2025.08)

[기고]
김상진 열사의 의거를 재조명해야 한다

차성환 조경학과 73

들어가는 말

올해는 김상진 열사 의거 50주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사)김상진기념사업회는 추모문집을 냈다. 또한 인혁당재건위 사건 50주년이기도 하다. 이 사건으로 돌아가신 8분의 열사에 대한 약전(『다시, 봄은 왔으나』)을 4·9통일평화재단 이창훈 사료실장이 펴냈다. 8분의 열사들이 돌아가신 날이 1975년 4월 9일이고 김상진 열사의 의거일이 4월 11일이다. 꼭 이틀 차이가 난다. 8분의 죽음과 김상진 열사의 의거는 깊이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두 사건의 연관성에 대한 의미를 필자도, 다른 사람들도 잘못 이해하고 있었고 이를 바로 잡아 의거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김상진 열사 의거에 대한 오해

필자는 1975년 4월 당시 서울대 농대 3학년 생으로 김상진 열사 의거 현장에 있었다. 그래서 열사의 죽음을 더욱 각별하게 기억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필자는 의거 이전에 열사를 알았거나 근거리에서 접촉하지는 못했고 의거 이후에 열사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정보를 통해 사건을 이해하고 있었다. 필자는 최근까지 김상진 열사의 의거가 인혁당 재건위 8분의 사형집행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해 왔다. 이는 열사에 대한 평전 『긴 겨울 얼음 뚫고』(1995)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김상진 열사 의거 50주년 추모문집 『오랫동안, 김상진』(2025)에 실린 임영태의 ‘김상진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현재적 계승’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김상진은 4월 7일 축산학과 대책위원장을 맡을 때 희생을 각오했다. 하지만 그때의 희생은 감옥을 가는 정도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할복이라는 목숨을 던지는 극단적인 투쟁방식을 결심하게 되는 계기는 박정희 정권의 인혁당 관련자 8인에 대한 사형 집행 사건이었다.

그런데 의거 50주년 추모문집에 실린 새로운 자료들을 보면서 이러한 평가들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4·9 사법살인이 김상진 열사의 의지를 더욱 확실하게 굳히는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그 이전에 이미 의거를 결심했다는 새로운 자료가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새로운 근거는 최근 필자가 확보한 김현인(원예 71) 선생의 구술자료이다. 이 자료들을 되짚어보면서 김상진 열사의 의거가 어떻게 계획, 실행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김상진 열사 의거 50주년 추모문집 『오랫동안, 김상진』에는 여러 자료들이 담겨 있다. 그 가운데 열사의 의거와 관련한 사실관계를 증언하는 자료가 2건 있다. 하나는 열사의 한얼 후배 김진간(농학 73)의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한얼 후배였던 권오섭(축산 74)의 기록이다. 이 두 사람은 열사의 의거 전후를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했으므로 신뢰성이 높은 자료다. 하지만 이 두 자료는 일치하는 기억과 엇갈린 기억을 동시에 진술하고 있다.

김진간이 기록한 ‘고 김상진의 할복 결심 과정’에 의하면 열사가 자결할 결심을 김진간에게 밝힌 것은 4월 7일 저녁 7시경이었다. 그날 낮 축산과 총회에서 단식투쟁을 결의한 당일 저녁이었다. 이때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대법원 판결이 나기 하루 전날이었다. 그리고 4월 10일에 한얼 비상소집이 있었고 그 자리에서 열사는 사생관, 시국관, 효도관에 대해 토론했다.

권오섭이 기록한 ‘김상진 군이 죽기 전 과정’이라는 글에는 4월 7일 오전에 축산과 총회가 있었고 오후에 한얼의 비상소집이 있었는데 그때 열사가 “정면 도전”, “내가 죽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두 기록에서 일치하는 바는 4월 7일에 열사가 결심을 밝혔다는 사실이고 엇갈리는 것은 한얼의 비상소집일을 김진간은 4월 10일로, 권오섭은 4월 7일로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권오섭은 2024년 12월 15일에 있었던 한얼 멤버들의 좌담회에서는 한얼 비상회의가 4월 9일 혹은 10일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러면서 같은 좌담회에서 열사의 결심은 인혁당재건위 사건 8분에 대한 사법살인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술회한다. 권오섭은 한얼 비상회의 소집 날짜를 1976년의 기록에서는 4월 7일로 기억했다가 2024년에는 4월 9일 혹은 10일로 기억한다.

그런데 한얼 비상회의가 4월 7일이었든 9일 혹은 10일이었든 간에 권오섭이 열사가 의거의 의사를 표명한 발언을 들은 것은 한얼 비상회의 자리에서였다. 반면에 김진간은 한얼의 비상회의가 있기 3일 전, 그리고 인혁당재건위 8분의 사형집행 2일 전에 열사가 김진간을 개별적으로 만나 거사의 결심을 밝히고 협조를 구했다는 사실을 사건과 가까운 시기(1970년대 후반으로 추정)에 명백히 밝혔다. 한얼 비상회의에서 한얼 멤버들에게 열사가 공개적으로 거사의 의사표시를 한 것은 그 이후였다. 그러므로 한얼 비상회의가 4월 9일 혹은 10일이었다면 권오섭이 열사의 거사 결심이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의 4월 9일 사법살인으로 촉발된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열사가 최초로 거사 결심을 표명한 것은 김진간과의 대화였다는 것이 현재 남아있는 명백하고 확실한 근거자료에 기반한 사실이다.

김상진 열사 의거의 진실

사실이 그렇다면 필자나 권오섭이 생각했듯이 열사의 거사 결심은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서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열사의 거사에 대한 의미 파악에서 매우 큰 차이를 낳는다. 다시 말해 열사의 거사는 4·9 사법살인의 충격으로 인한 저항이 아니라 독자적인 정세 판단과 운동론에 기초한 저항이라는 것이다. 열사가 그런 정세 판단과 운동론을 논리적으로 정리해서 따로 남기지는 않았지만 김진간의 기록에서 열사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다. 김진간이 남긴 기록 가운데 ‘사건의 배경: 현실적 한국 상황 인식을 정리’ 제하의 내용은 열사의 생각을 김진간이 나름대로 정리한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몇 년째 계속돼 온 학원 사태의 악순환 속에서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 없이 학원은 또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서 현재와 같은 학원운동으로서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고 고인은 당시 생각하고, 고도로 발달된 정보정치 시대에서 전국적 규모의 학생조직으로 거국적인 학생운동으로 일으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이므로 당시 상황에서 몇 사람의 희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당시 고인은 반정부세력이 어느 정도 성숙하고 있다고 판단했었고 몇 사람의 희생을 도화선으로 밑으로부터의 전민중적 개혁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판단 하에서 고인은 제1의 도화선으로서 할복할 결심을 했던 것이며 그 행위는 오늘의 한국 현실에서 자신이 꼭 죽어야만 할 시기이며 자신이 살아가는 동안 두 번 다시 자신의 생명을 값지게 바칠 기회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인은 이 암울한 시기에 조국의 영광과 자신을 위해 후회 없이 죽어야겠으며 진정한 한얼 정신의 실현을 그 속에서 찾겠다고 이야기했다.(후략)

위 내용을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열사는 정보정치 하에서 전국적 규모의 학생조직에 의한 거국적 학생운동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는 1974년의 민청학련사건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사전 탐지되어 실패한 경험에서 초래한 인식이라고 생각된다. 즉 조직에 기반한 운동은 정보정치에 의해 차단될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둘째, 그럼에도 반정부세력이 어느 정도 성숙했다고 판단했다는 것인데 이는 1974년 후반기의 전국적 학생시위와 언론자유수호투쟁, 백지광고사태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결성된 야당과 재야의 민주회복국민회의 등 민주화세력의 결집에 이르는 민주화 열망의 고조에 근거한 판단이라고 생각된다. 셋째, 이런 정세에서 몇 사람의 희생을 도화선으로 밑으로부터의 전민중적 개혁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는 열사가 4·19의 경험에서 유추한 판단이 아닐까 싶다. 4·19항쟁에서 김주열의 죽음은 도화선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열사는 김진간과의 대화에서 이 거사가 단순한 학생운동이 아니라 바로 혁명의 시작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또한 4월 10일 의거 전날 밤, 열사는 한얼의 집회에서 “현재의 시국은 한 티의 불씨를 기다리는 용광로와 같고 그 한 티의 불씨가 절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열사는 당시의 정세를 민주화를 향한 대중적 열망이 어느 정도 성숙해 있으며 학생운동의 조직화보다는 몇 사람의 희생을 통해 민중봉기를 촉발하는 방식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 판단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열사는 단순히 대통령에게 호소하거나 독재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 것이 아니라 민중봉기를 기대하면서 그 도화선이 되고자 했던 것임이 분명하다. 그 과정에서 4·9 사법살인이 발생하면서 그 결심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겠으나 열사의 행동을 이끈 동력은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추동하기 위한 전략적 판단에서 나온 것이지 4·9 사법살인에 대한 분노에서 촉발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열사의 의거가 4·9 사법살인에서 촉발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우선 열사가 의거에 임하면서 남긴 문서들이다. 열사는 ‘양심선언문’과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이라는 2건의 문서를 남겼는데 이 문서들을 살펴보면 4·9 사법살인에 대한 언급은 ‘양심선언문’에 딱 한번 등장할 뿐이다. 그조차도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가운데 4·9 사법살인을 구체적으로는 언급하지 않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가고 있다.”고만 표현했다. 열사의 거사 결심이 4·9 사법살인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사건을 그토록 간단히 언급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두 문서 모두 주된 논지는 유신독재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열사의 행동이 순수한 양심과 사명감, 사회정의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하면서 대통령 박정희의 퇴진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열사의 시야는 4·9 사법살인의 불법성, 비인도성보다 훨씬 폭넓은 것이며 유신체제라는 폭압적 독재권력과의 대결이 핵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열사의 행동이 대중 봉기를 기대하는 전략적 판단에서 나온 것임을 뒷받침해 주는 또 하나의 근거는 의거를 앞두고 진행된 치밀한 준비과정에서 나타난다. 열사는 자신의 죽음을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해 후배 박영윤(축산 72)에게 자신의 육성을 녹음하도록 하고 김진간을 통해 학보사의 김태홍(농교육 73)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후배 신윤태(농교육 74)에게는 사건 직전에 시청 기자실에 연락해 기자가 취재하도록 부탁하게 했다. 후배 양권일(축산 74)에게 당일 낭독할 유인물을 동아일보에 전달하라고 부탁했다. 또 후배 한순갑(축산 72), 박영윤(축산 72)에게는 DBS에, 최윤림(축산 72), 박진국(축산 72)에게는 CBS에 녹음테이프를 전달하도록 부탁해 두었다. 이는 열사의 죽음이 대중 봉기의 촉발을 위한 도화선이 되려면 가급적 널리 알려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준비했던 조치들이었다. 이 때문에 열사의 죽음은 그 직후에 일부 매체에서 작게나마 보도되었고 상당히 널리 알려졌다. 그런 치밀한 준비가 없었다면 열사의 죽음이 단기간에 널리 알려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비록 독재권력의 언론 통제로 인해 더 크게 알려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상당한 반향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열사의 준비 덕분이었다.

그리고 최근(2025. 6. 18) 필자가 확보한 김현인 선생의 구술자료는 열사의 거사 결심이 4.9열사들에 대한 사형집행 이전에 이루어졌음을 시사하는 또 하나의 근거이다. 김현인 선생은 박석두, 김태홍 등과 함께 당시 서울농대 학생시위를 은밀하게 기획, 실행했던 분이다. 1975년 3월 28일, 4월 4일 시위를 기획, 준비했고 4월 11일의 시위를 준비하던 과정에서 열사의 거사 결심을 전달받았다고 한다. 김현인 선생의 구술증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4월 4일 서울농대 시위가 끝난 다음인 4월 5일에서 4월 7일 사이의 어느 날 밤에 주경석(농교육 71)의 연락을 받고 그를 만났다. 주경석은 당시 교육학과 학생이었지만 축산학과 강의를 함께 들으면서 열사와 알게 되었다고 했다. 주경석과 만난 자리에 김태홍도 있었던 것 같다. 그 자리에서 주경석은 축산학과에 김상진이란 사람이 있는데 그가 할복 자결을 하려 한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렇게 하면 절대로 안 된다고 언성을 높이면서 반대했다. 당시 나의 판단으로는 만일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유신정권이 학교(농대) 문을 닫아버리고 긴급조치 등 억압의 명분으로 삼을 것인데 그렇게 되면 안 된다고 반대했다. 그로부터 며칠 지난 4월 8일에서 10일 사이에 (열사 측에서) 다시 주경석을 통해 할복을 하지 않을 테니 집회에서 발언을 하게 해 달라는 의사를 전달해 왔고 나아가 4월 11일 집회를 축산과가 주도해서 하겠다고 했다. 당시 나와 김태홍은 4월 19일 나아가 5월까지 시위를 끌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4월 11일 집회에 사회 볼 사람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축산과가 주도하도록 했다. 열사 의거 당일 나는 집회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 학교를 빠져나갔다. 왜냐면 다음 시위까지 내가 드러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열사의 거사 장면을 나는 보지 못했다.

김현인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열사의 거사 결심은 4월 9일(4·9열사의 사형집행일) 이전에 주경석 선생을 통해 전달되었으나 자신이 강력히 반대했고 그러자 새로운 제안을 해왔다는 것이다. 당시 서울농대 시위에서 김현인 선생의 위치를 생각할 때 이 증언은 매우 신빙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단지 안타까운 점은 열사의 의사를 전달한 주경석 선생이 지금은 그와 관련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하는 점이다. 김현인 선생에 의하면 주경석 선생은 1980년 5·18항쟁과 관련한 사건으로 엄청난 폭력 피해를 겪은 후 지금도 그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계신다고 한다. 1975년의 기억이 사라진 것은 그런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가는 말

이상의 자료들을 근거로 필자는 열사의 거사가 4·9열사의 사형집행에 충격을 받아 결행되었다는 기존의 통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4·9열사의 희생이 있기 전에 열사는 독자적인 판단으로 정세를 분석하고 거사를 결심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거사 이전의 열사의 움직임이 정확하게 알려지지 못했고 또한 4·9열사의 희생이 당시 상황에 던진 충격이 컸던 데다가 열사의 거사가 그로부터 단 이틀 후에 이루어졌으므로 열사의 거사 동기가 왜곡되게 이해되었던 것이다.

열사의 거사는 독자적인 정세 판단 위에 세워진 전략적인 사고가 바탕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래서 즉흥적이거나 감정적인 행동이 아니라 뜨거운 열정을 내재하고 있으면서도 치밀한 이성에 인도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함으로써 우리는 김상진 열사의 죽음이 갖는 민주화운동사에서의 위상을 재평가할 수 있다. 열사는 4·9 사법살인의 불법성, 잔학성에 분노하여 자결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정세에 대한 판단 위에 나름의 운동 전략을 세워 자신의 행동 방향을 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열사 주변의 동료나 후배들은 그 전략과 행동 방향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혹은 너무 급진적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열사가 자신의 의중을 상당히 드러낸 시점에 와서도 깨닫지 못했거나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열사의 죽음이 알려지자 그 사건 자체가 큰 파문을 일으켰다. 대학생이 목숨을 바쳐서까지 민주주의를 열망하며 희생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독재권력에게나 민주화운동세력에게나 또한 대중에게도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그 죽음을 알리고 추모하기 위한 움직임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학생, 야당, 종교계를 포함한 추모와 저항의 물결은 부산, 광주, 목포 등 지방에도 파급되었다. 아쉽게도 이 물결은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 패망이라는 정세를 이용한 유신독재가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라는 반동적 공세를 취함으로써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런데도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된 지 2주도 지나지 않아 서울대에서 오둘둘 시위라는 강력한 저항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후 그로부터 5년 동안 김상진 열사의 죽음은 공개적인 추모행사조차 하지 못할 만큼 망각을 강요당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은 텅 빈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저항의 씨앗이 자라나는 시간이었다. 유신체제의 철옹성에 균열을 낸 열사의 죽음은 학생운동과 민중운동의 새로운 성숙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부마항쟁과 5·18항쟁이라는 거대한 민중항쟁이 일어나는 것은 열사의 사후 5년 전후의 시점이었다. 비록 일정한 시차는 있었지만 열사가 기대했던 민중 봉기의 시대가 마침내 열렸던 것이다.

(추기)

필자는 김상진 열사의 의거를 재조명하자는 주장을 새로운 토론의 촉매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안하는 바이며 이전의 활동에 대한 비판이나 폄하가 목적이 아님을 밝힌다. 다만 1995년에 출간한 열사의 평전 『긴 겨울 얼음 뚫고』는 당시 추진한 분들의 열정과 노고는 충분히 인정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한계가 많다는 점에서 전면적으로 개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김상진기념사업회, 1995, 『긴 겨울 얼음 뚫고』, 도서출판 녹두

김상진열사50주년기념사업회추진위원회, 2025, 『오랫동안, 김상진』, (사)김상진기념사업회

이재오, 1984, 『해방후 한국학생운동사』, 형성사

이정식, 1993, 『새로운 학생운동사』, 도서출판 힘

이창훈, 2025, 『다시, 봄은 왔으나』, 도서출판 삼인

임미리, 2017, 『열사, 분노와 슬픔의 정치학』, 도서출판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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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환_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부산고와 1973년 서울농대 조경과 입학,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부산대에서 정치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농촌경제연구원에 근무하던 1979년 이른바 ‘남민전 사건’에 관련돼 구속 수감됐다가 88년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출감했고, 99년 복권했다. 94년부터 이듬해까지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감사를 지냈고, 2000년부터 2018년까지 민주공원 운영실장, 행정총무부장 등을 맡아 민주공원 운영의 실무를 익혔다. 2005-2007 민주공원 관장, 2016-2018 민주주의사회연구소장, 2018-2022년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을 역임했다. (csh0429csh@naver.com)

Last modified: 2025-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