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표 몽양기념관 관장

김상진 열사님 고맙습니다. 열사께서 지켜보면서 뜨거운 갈채를 보내주셔서 지난 4월 4일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역사적인 선고가 있었습니다. 온 국민이 간절히 소망하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것을 체감하는 날이었습니다. 엊그제는 열사께서 그토록 고뇌하던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간 무고한 백성, 4.9 통일 열사 50주기 추모제가 있었습니다. 1975년 4월 9일 대법원에서 이른바 인민혁명당, 인혁당 사건 피고인 8명에게 사형을 선고한 후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되자 열사께서는 이틀 동안 고통스러운 몸부림을 하면서 대결단을 하셨지요.
열사께서는 양심선언을 낭독하면서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조국의 민주주의를 성취하는 길이며, 영원한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것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고 선언하시면서 결행하셨습니다.
지난해 12월 14일 국회에서 윤석열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었습니다. 재적 의원 300명 중 204명이 탄핵 찬성표를 던져 헌정 사상 세 번째로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입니다. 이날 이후 정치인 신뢰도 조사 1위는 우원식 국회의장이었습니다. 우 의장이 국민들에게 또 인기를 끌게 된 이유는 12월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당시 담을 넘어 국회에 들어가 즉각적인 대응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언론에서는 4일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 표결 때와 14일 국회 본회의 탄핵 표결 때 착용했던 연두색 넥타이에 유난히 관심을 많이 표명했습니다. 우 의장은 4일 비상계엄이 해제된 후에 SNS를 통해 연두색 넥타이를 매게 된 경위를 밝혔습니다.
“오랜만에 김근태 형님의 유품인 연두색 넥타이를 맸다. 이 넥타이는 제가 큰 결정을 해야 할 때 꼭 매던 것. 넥타이를 맬 때마다 속으로 ‘김근태 형님 꼭 도와주세요. 용기를 주세요’라고 다짐을 하곤 했다. 계엄 해제 의결 후 ‘형님 감사합니다’를 속으로 되새기며 본회의장을 나왔습니다.”
국내 경제 정세가 친위 쿠데타와 내란 책동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와중에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온 국민에게 희망과 자존심을 일궈주는 계기가 됐습니다. 지난해 12월 7일 스웨덴 한림원에서 열린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강연회에서 한강 작가는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우원식 의장의 기원과 다짐처럼 1948년 제주 4.3과 1980년에 광주 5.18이 2024년에 서울과 대한민국을 구한 것이 아닐까요? 2011년 말 운명 하기 직전에 남긴 ‘2012년을 점령하라’는 김근태의 유언을 우 의장은 깊이 새기고 있는 듯합니다.
김근태 선배는 1965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이래 엄혹한 1970년대와 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산증인이었습니다. 김 선배는 70년대를 온통 수배와 도피 생활로 일관했습니다. 71년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 74년 민청학련 사건, 75년 김상진 열사 추모 집회 사건 등으로 70년대를 관통했습니다. 75년 김상진 열사 추모 집회는 5월 22일에 했기 때문에 오둘둘 사건, 오둘둘 시위라고도 합니다. 민청학련 사건 이후로 김 선배와 저는 71년 위수령 때 제적됐다가 강제 징집 후 복학한 동료들과 함께 모임을 갖기로 했습니다. 대부분 68년, 69년에 입학한 친구들이었습니다. 정세 분석과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토론하며 울분을 토하곤 했죠. 65년 입학한 김 선배가 좌장 역할을 했습니다.
1975년은 서울대 단과대학 캠퍼스가 관악으로 합쳐진 첫 해입니다. 우선 문리대, 상대, 법대, 사범대, 음대, 미대가 이주했습니다. 공대와 농대는 아직 옮기지 않았고요. 관악 캠퍼스의 첫 봄은 유신 철폐, 학원자유화 투쟁 등으로 뜨거웠습니다. 4월 들어 민청학년 사건 1주년, 자유 언론 투쟁 등 시위가 활기를 띠다가 4월 9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 8명에 대해 대법원에서 선고 내린 지 18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하여 시국은 바짝 얼어붙었습니다. 사법 살인을 강행하여 세계 사법사상 최악의 날로 기록됐습니다. 이 상황을 보고 치열하게 고뇌하던 축산과 복학생 김상진은 4월 11일 서울 농대 시국성토대회에서 양심선언을 낭독하면서 할복 자결을 결행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며 분신한 지 4년 5개월 만의 일입니다. 김상진의 할복자결은 온 나라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시국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면서 활동하던 서클 가면극 연구회와 문학회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움직였습니다. 또 사범대 야학 문제 연구회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서울대 전체 휴교령을 내렸다가 한 달 뒤인 5월 13일에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습니다. 긴급조치 9호는 옴짝달싹하지 못할 정도로 구속하는 조치입니다. 김상진 열사 장례 집회를 준비한 단위들이 모두 중단해야 했습니다. 이날 저녁 긴급 대책 모임을 갖고 시위 강행 여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대책 모임에서 대체로 현실적인 상황을 감안해서 신중론이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야학 문제 연구회의 박연호(교육학과 73, 전남대 명예교수) 학우가 ‘죽은 사람도 있는데 감옥에 가는 게 대수입니까’라고 한 한마디에 일거에 행사를 추진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복학생들은 대체로 얼굴이 많이 알려져서 아무도 강경한 발언을 하지 못했습니다. 김근태 선배는 이 자리에서 주로 이야기를 듣고 격려하면서 신중한 처신을 당부했습니다.
세 서클 모두 데모를 주도한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위 준비와 진행에 차질이 없이 된 셈입니다. 복학생 그룹은 얼굴이 알려져 있어서 시위 현장에 나가지 않고 관악 캠퍼스에 화재 비상벨 누르는 것을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대형 강의실 뒷자리에 앉았다가 집회 쪽지를 앞으로 전달했습니다. 이렇게 치밀하고도 헌신적으로 준비하여 애초에 100명도 안 되는 인원에 10분 버티기도 힘들 것이라는 예상을 벗어나 1천 명이 넘는 인원이 2시간 넘게 집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석방되고 나서 77년 가을쯤에 여전히 수배 도피 중인 김근태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김 선배가 미리 연극 표를 준비했어요. <아일란드>라는 연극입니다. 남아공 출신의 극작가가 원작으로 인종 차별 문제와 인간 존엄성에 관한 물음을 던지며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왔던 작품이라고 합니다. 배우 두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감옥을 배경으로 연기하는데 김근태 선배가 제 손을 꼭 잡고 얼마나 고생했니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김상진 열사 50주기를 맞아 제가 김근태 선배 얘기를 하는 것은 한강 작가의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릴 수 있는가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김상진 열사 50주기를 맞아 김근태 선배를 비롯 채광석, 김도연, 김석원, 유상덕, 박부곤, 박원순, 최창식, 홍순복, 정성현, 김배철 등 작고한 오둘둘 영령들의 가호로 2025년 현재의 대한민국이 조국의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가 구현되는 미래의 대한민국을 구할 수 있기를 염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