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우 (사)김상진기념사업회 회장

날마다 “계엄”이었던 그해 봄. 한 청년이 걸어 나왔습니다. 휴대폰도, SNS도, 헌법재판소도, 제대로 된 국회도 없었던 그 시절. 아무런 죄 없는 평범한 시민들이 법원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되던 야만의 시대. 그 엄혹한 철권 독재에 맞서 죽음으로 항거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김상진. 그가 역사의 재단에 몸을 던진 그날 이후 딱 50년이 지났습니다.
매년 우리는 열사의 영정 앞에서 질문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올해는 이 질문이 더욱 깊고, 절실합니다. 21세기 상상도 못 했던 계엄령이 발동되고, 그를 통해 집권연장을 모색하던 내란의 무리들이 일으킨 친위 쿠데타를 시민의 힘으로 제압하고, 헌법재판소에 의해 내란의 수괴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것이 불과 1주일 전이기 때문입니다.
김상진 열사 의거 50주기를 맞이한 오늘, 우리는 그의 정신이 반세기 동안 한국 민주주의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되새기며, 열사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우리의 굴곡진 현대사를 함께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김상진기념사업회는 열사의 유지를 이어가고자 1988년 창립되었고, 열사와 관련된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민주주의라는 큰 강을 이루기 위해 수십 년을 함께 걸어왔습니다. 그 여정 속에서 우리 사업회는 열사의 유족을 위로하면서 또 다른 열사들의 기념사업과 연대하며, 고인의 묘지와 기념비를 보존하고, 장학사업과 출판활동을 통해 후배들에게 열사의 정신을 올곧이 전하고자 했습니다.
5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는 그동안의 꾸준한 노력이 매듭지어졌습니다. 관악캠퍼스 강의실엔 숙원사업이던 ‘김상진홀’이란 이름이 붙어 이제는 우리의 후배들이 일상 속에서 김상진의 저항정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까지 기념사업회의 활동을 백서형식으로 엮은 ‘추모문집’을 제작했고. 그리고 이 자리, 열사의 의거가 있었던 이 역사적 장소는 ‘김상진민주광장’이란 이름으로 새 단장을 하여 오늘을 사는 학생과 민주시민에게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의 공간으로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1975년 4월 11일, 김상진 열사가 몸을 던지며 남긴 역사적 신념은 단 한 번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남긴 피의 외침은 4년 뒤, 독재자 박정희를 역사의 뒤안길로 데려갔고,
80년 5월 광주의 피 묻은 골목에서, 87년 6월 유월의 거리에서, 그리고 2017년 유신의 잔당들을 청산하는 촛불의 바다 위에서 되살아 났으며,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위태로울 때마다 김상진이라는 이름은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서 다시 불꽃처럼 살아났습니다.
그는 쓰러진 것이 아니라, 깨어 있었고
저 지하에서 침묵한 것이 아니라, 쉼 없이 우리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바로 그 이름이,
죽음을 넘어 시대를 건너
오늘까지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운 가장 오래된 맥박이었음을
우리는 이제야, 더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윤석열이라는 사상 유례없는 형태의 반민주·반민족적 괴물이 우리의 역사에 등장했습니다. 권력을 사유화하고, 헌법 질서를 무시하며, 민족의 자존심마저 외세에 내어주고, 민주주의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던 그 정권은 결국 또 한 번의 시민혁명으로 파면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민주화운동 속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열사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켜주었음을 우리는 느끼고 있습니다. 촛불과 함성, 그리고 응원봉 하나하나에 담긴 열망이 “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겠다”던 열사의 외침이 우리 가슴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우리 모두 함께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제 추모의 언어를 넘어, 우리 민주주의의 혈관 속을 흐르는 영원한 맥박입니다. 김상진 열사를 기억하는 이들의 힘은 흩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 정신은 세대를 넘어 시민들의 일상 속에서 살아날 것입니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 했습니다. 우리 모두의 피땀으로 다시 한번 그 뿌리를 적셨고, 앞으로는 민주주의 줄기와 가지는 더 단단히 뻗어 나가게 할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다짐합니다. 이 농과대학 교정에서 민중적 실천을 통해 배우고 익혔던 농업의 다원적 가치를 지키고, 민주주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 대단결을 지향하는 김상진의 정신을 오래도록 이어가겠습니다. “오랫동안 김상진”이라는 슬로건은 그런 뜻으로 만들어진 우리 모두의 다짐입니다.
50년 세월 아픈 상처를 보듬고 오늘날까지 함께해 주신 김상운 형님을 비롯한 유가족분들에게 사랑과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몇 차례의 시민혁명 과정에 꺼지지 않는 불꽃 열정으로 함께 하신 서울대 민주동문회, 특히 50년의 세월을 열사와 특별한 인연으로 함께 해주신 5.22 선배 동지들께 감사와 존경을 표하며 이 자리에 함께 해주신 수원지역사회 민주주의 계승과 혁신의 주인공들, 그리고 최근 빛의 혁명과정을 광장에서 함께 하신 전국의 동지들께 뜨거운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세대를 뛰어넘는 우리들의 굳은 연대가 곧 이 시대의 희망임을 믿고 김상진의 이름으로 여러분과 오래도록 함께할 것을 다짐합니다.
2025년 4월 11일
(사)김상진기념사업회 회장 정근우
Last modified: 2025-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