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세웅 신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고문

오늘 김상진 열사 50주기 추모제 함께 하면서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종교인으로서 미사 봉헌하는 마음으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유가족 되시는 분들께 마음을 모아 인사드리고 많은 희생자들, 또 열사들 가족들이 함께 계시는데 그 모든 분들을 마음에 모시면서 함께 기도의 마음으로 대화에 임하고자 합니다.
제가 한 두어 달 전에 김상진 열사에 대해서 인터뷰를 했어요. 그 당시에 그 후배님들이 김상진 선배님의 삶을 기리면서 찾아오셨는데 제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김상진 열사도 참 훌륭한 삶을 사셨지만 그 열사의 삶을 계승하는 후배들의 열정 속에서 아름다운 미래를 또 확인했습니다. 오늘 제게 주신 제목이 너무 거창해요. “1975년 김상진 열사 의거의 역사적 의미와 현재적 조명” 이렇게 돼 있는데 이 자리에서 과거의 그 내용들을 체험하고 우리가 할 일들을 함께 확인하는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는 자체가 아름다운, 장엄한 기도
제가 사제로서 이 기회에 함께 나누고 싶은 몇 가지 내용들이 있는데요. 우선 아까도 여러분께서 말씀하셨는데 우리 한강 작가의 노벨상과 많은 작품들 속에 나오는 내용들이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여기 김학민 작가도 와 계시는데 김학민 작가께서 ‘한국 현대사는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타기 전과 후의 시대로 구분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셔서 제가 그 말씀을 마음에 되새기면서 묵상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도울 수 있는가’, 또 ‘과거가 현재를 살릴 수 있는가’ 이게 사실 종교적 주제입니다. 그분은 글자로서 이러한 말을 했고 또 모든 종교인들, 그리스도인들도 이 내용을 가슴에 되새기고 있습니다. 오늘 이 행사가 넓은 의미에서 종교적 의미를 가진 그런 행사가 되겠죠.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는 그 자체가 아름다운, 또 장엄한 기도입니다.
반성에서 시작되는 민주적 공동체
저는 이 시간에 함께 과거를 생각하면서 각자, 각자 나 자신을 반성해야 된다, 이런 내용들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종교인으로서 제일 처음에 하는 작업이 자신에 대한 반성입니다. 개인적인 반성, 또 가정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반성을 기초로 해서 그다음에 해야 할 일이 또 정화되는 과정, 내가 깨끗해지고, 공동체와 하나가 되고, 선조들의 뜻과 하나가 되면서 아름다운 큰일을 이룩해 내자, 이게 사회학적인 언어로는 민주적 공동체를 이룩하는 일이 되겠습니다.
이 기념식에서 저는 또 많은 것을 배우는데 이곳 옛날 서울농대 자리, 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많은 노력들을 (정근우 김상진기념사업회) 회장님이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 공간뿐만 아니라 이 건물 자체가 김상진 열사의 기념관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합니다. 저 또한 경기도와 끊임없이 대화로 돕겠습니다.
양심선언문 자체가 인간의, 양심의, 종교적, 정치적 선언
사실 핵심은 늘 인간이 중심인데요. 1970년대 마다가스카르 신학자들의 선언‘사람은 존재론적으로 정치적이다’입니다. 종교 자체가 정치적입니다. 종교가 너무 남용되었기 때문에 정교분리라는 원리가 태동되었는데 사실은 정교분리라는 것은 이론적으로, 신학적으로는 틀린 말입니다. 정교분리가 아니라 정교는 구분이 돼야 됩니다. 분리할 수가 없어요. 제가 종교인으로서 100% 정치인의 삶을 살고 또 투표 행위도 하고 이 모든 게 다 정치적입니다. 그런데 중세 때 우리 가톨릭이 권력 남용으로 종교가 정치권력을 다 독점했었기 때문에 정교분리 정책이 나왔다가 또 종교가 박해를 받으니까 다시 또 정교분리가 나왔는데 이론적으로는 정치와 종교는 하나다, 다만 구별이 된다, 이 내용을 우리가 이해해야 되고요. 지금 사이비 종교인들이 떠드는 것은 종교가 아니고 그것은 사실 정상배, 정치를 상업화시키는 정상배의 무리들이죠. 이런 내용들은 돌아가신 안병무 교수님이 신학적으로 말씀해 주셨어요. 그래서 종교가 제자리에 가는 것과 정치가 제자리로 가는 것, 그게 바로 하나가 되고 또 우리 김상진 열사의 양심선언은 이 자체가 종교적인 선언이고, 또 인간의 선언이고 또 양심의 선언, 정치 선언이 되겠죠. 그런 내용들 함께 되새겨 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과연 누구이고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 되돌아보는 시간
저는 이 자리가 곧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의 자리, 선조들 앞에서 또는 김상진 열사 앞에서 ‘나는 과연 누구이고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가정에 대한 숙고, 부부에 대한 생각, 자녀들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늘 꿈꿔야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저도 저녁에 숙소로 가면서 사람들이 사는 집을 봅니다. 낮에 이렇게 활동했다가 다들 밤에는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로 가는 거예요. 동물들도 다 자기 보금자리로 갑니다. 옛날에 우리는 대체로 대가족 문화인데 지금은 핵가족 문화가 되어서 아파트 문화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개인주의, 이기주의로 치닫고 있는데 이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우리가 어떻게 노력해서 극복할 수 있는가’ 이게 우리 시대의 큰 고민, 숙제라고 생각을 해봤습니다.
김상진 열사의 결단은 공동체 정신의 발로
저는 신학도로서 늘 ‘인간은 누구인가’ 자문합니다. 성서적 관점에서는 ‘인간은 하느님의 닮은 꼴’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도 자녀를 낳으면 ‘아버지를 닮았다, 어머니를 닮았다, 또는 외탁이다, 친탁이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모습뿐 아니라 목소리, 어떤 때는 행동까지도 비슷한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는 인간의 뿌리를 이야기할 때 보진 못했지만 ‘난 절대자 하느님의 닮은 꼴이다’ 이렇게 설명하면서 고백을 했었는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간이 가장 존엄하고 고귀하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개인적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부부와 자녀, 가족 공동체, 늘 이웃과 함께 살게 되어 있죠. 그래서 ‘개인의 존엄과 함께 가족의 존엄, 사회의 존엄을 늘 함께 이야기해야 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동시대의 친구와 함께, 이웃과 함께 살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함께 사는 개념이 두 가지가 있는데 우리가 친교 공동체 또는 사회 공동체라는 말을 씁니다. 사회란 말은 영어에서 소사이어티, 또 공동체는 커뮤니티이죠. 소사이어티는 그냥 일종의 집단 모임을 상징하고 있고 커뮤니티는 아름다운 가치, 정을 기초로 해서 형성되는 일체의 단위이죠. 종교인 경우에 공동체라는 많이 쓰고 일반인들의 모임은 사회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 사회와 공동체가 늘 연계돼야 됩니다. 김상진 열사의 결단도 이러한 공동체 정신의 발로로서, 군 생활하면서, 또 제대하고 학교에서 후배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박정희 유신 독재의 모순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것은 바로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사랑, 헌신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우리가 쉽게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가정, 학교, 친구, 사회, 정치와 종교, 각 동아리 모임 통해서 ‘나는 과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럴 때마다 오늘 이 순간을 기점으로는 ‘김상진 열사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어떻게 사고하셨을까’ 이런 내용들을 저는 이렇게 종교적인 관점으로 해석을 하고 싶습니다.
결국 제가 신학자로서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중세 유명한 대신학자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이론인데요. 신학자들은 그 내용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출발 신학, 내가 어디에서 왔는가를 생각해라. 그런 내용들은 창조론에서부터 시작이 되고요.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다 죽어야 돼요. 귀환 신학, 내가 어디로 가는가이죠.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가 그런 물음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늘로 간다고 이야기합니다. 천상병 시인은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간다고 시로도 묘사했지 않습니까? 인간의 기원을, 목적을 진지하게 묵상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을 해봤습니다.
불의에 맞서 목숨을 건 결단은 교리적으로도 수용
1975년 당시 우리 김상진 열사는 26살 청년이셨어요.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선택했던 그 결단의 의미를 되새겨봅니다. 75년은 잘 아시는 대로 박정희가 2월달에 유신헌법에 대한 일방적인 찬성 논리를 요구하는 국민투표를 했고 또 긴급 조치 1호, 2호, 3호, 4호로 구속되신 분들 일부를 석방을 했죠. 그러고 나서 4월 9일, 인혁당 사건으로 8분을 사형했어요.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 김상진 열사가 고민하시다가 11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동료 학우들에게 호소하는 양심선언문을 발표했는데 양심선언문이 우리 시대의 길잡이가 돼야 되겠습니다.
저는 당시에 이 내용을 늦게 들었습니다. 제가 4월 9일에 여덟 분이 돌아가신 다음에 추모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그 추모 성명서가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중앙정보부 5국으로 신부들 5명이 끌려갔어요. 밤새껏 시달리고 모욕당하고 이틀 뒤에 나왔는데 우리 신자분이 김상진 열사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주면서 명동 성당에서 가능하면 장례식이라도 하면 좋겠다고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저희들은 양심선언문을 입수한 다음에 명동 성당에서 18일에는 가톨릭 학생회 주최로 사제들이 미사를 봉헌했고 22일에는 민주회복국민회의 주최로 명동 성당에서 대대적으로 추모제를 거행하려 했는데 명동 성당 일대가 경찰에 의해서 완전히 차단이 됐어요. 그래서 연세 드신 분들 몇 분만 들어오시고 성당에 있던 사제들하고 약식으로 조촐하게 미사 봉헌하고 추모제를 거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김상진 열사의 양심선언문을 보면서 대단히 부끄럽고 가슴이 아팠는데요. 제가 1967년 로마에 있을 때 체코슬라바키아를 소련 군대들이 점령했어요. 그때 체코의 청년 몇 분이 자결했습니다. 그때 바울 6세 교황이 바티칸에 모인 군중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스스로 목숨 끊는 것은 가톨릭 교리에서 인정하진 않지만 불의한 침략, 소련에 맞서서 항거했던 청년들의 항거, 그리고 목숨을 끊었던 이 의거는 어떤 의미에서 순교에 비유할 수 있겠다’ 이렇게 해석하신 거예요. 67년 바울 6세 교황의 그러한 선언이 가톨릭 교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불의에 맞서 목숨을 건 결단은 교리적으로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 이렇게 가톨릭에서 넓게 해석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배경 때문에 제가 과감하게 김상진 열사를 위해서 명동성당에서 장례식을 거행할 수 있겠다고 선택을 했습니다. 이제 이런 내용들도 함께 되새기고 싶고요.
저는 김상진 열사를 묵상하면서 앞서 돌아가신 전태일 열사, 그리고 또 그 후에 88년에 목숨을 끊은 우리 조성만 열사 이 세 분이, 그 외에 많은 노동자, 청년, 학생 열사들이 참 많이 계십니다만 상징적으로 이 세 분들, 전태일, 김상진, 조성만 이분들이 우리에게 준 70년 80년대의 길잡이 교훈은 우리가 앞으로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방향타가 돼야 되지 않을까 이렇게 묵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 돌아가신 분들을 제가 다시 묵상을 했습니다. 죽음에는 여러 가지 단계와 과정이 있어요. 자연사, 나이가 들면 다 누구나 죽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그것과 함께 병사, 물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사고도 있습니다. 그러한 죽음이 있고 억울하게 타살당하신 분들, 그리고 또 하나의 유형은 우리 김상진 열사와 같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분들,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분들 중에서도 두 가지 유형으로 우리가 나눌 수 있는데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목숨을 끊으신 분도 계시고 공동선, 공적인 이유 때문에 목숨을 끊으신 분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을 우리가 더 높이 기리고 칭송하는데 김상진 열사가 바로 공적 가치와 목적 때문에 목숨을 끊으신 그러한 부류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면서 일제강점기 때 민영환 지사, 조병세 지사, 양산 군수 향산 이만도 지사, 금산 군수 홍범식 지사, 또 역사학자인 매천 황현 지사 이런 분들 나라를 빼앗겼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어요. 이런 분들의 역사와 가르침이 우리들 안에 살아 숨 쉴 때 아름다운 미래가 이룩되지 않을까 이런 꿈을 꿨습니다.
김상진 열사 의거 50년, 아름다운 민주 공동체 형성이 우리의 소명
제가 올해 을사밀약 120년을 맞이해서 여러 군데서 얘기도 나누고 묵상을 했는데요. 1905년 을사밀약 120년의 아픔 우리가 되새겨야 됩니다. 1945년 역시 80년 전인데 해방되었다지만 남북으로 분단이 되었어요. 아픔의 역사죠. 그리고 1965년 한일 수교 굴욕 외교도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금 일본에서는 그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의미를 되살려야 되지 않느냐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이런 상황 속에서 2025년 올해 모든 독재의 집합이고 괴물인 윤석열을 우리가 몰아냈습니다. 이제 이런 뜻깊은 2025년, 우리 김상진 열사 희생 50년을 맞는 이 해를 기점으로 정말 아름다운 세상을 이끌어내야 되지 않을까, 이분께서 남기신 그러한 유서의 내용을 기초로 해서 아름다운 민주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그러한 소명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유서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무릎을 꿇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서서 죽겠다’라는 개신교 성가의 가사를 마음속에 되새기고 유서에 나오는 마지막 대목에 ‘일체의 정치적 자유를 질식시키는 공포의 병영 국가’를 아파하고 고민했습니다. 제가 이 글귀를 뽑아서 붓글씨 썼습니다. 박정희 시대는 병영 국가였어요. 박정희 독재 때 거기에 목숨을 걸고 항거했던 우리 청년 김상진 열사의 마음을 늘 간직하면서, 저는 김상진 열사의 사진을 보면서, 오늘 이 자리에 열사 동료분들이 많이 와 계신데 50년이 지나니까 다들 늙으셨잖아요. 그런데 우리 김상진 열사는 영원한 청년입니다.
부활은 고통을 껴안는 것
영원한 청년, 26세 영원한 청년, 김상진 열사를 마음에 모시면서 단테가 얘기했던 지옥의 표현 ‘공기도 검다’ 이렇게 표현하는데 흉강 공기가 검은 거예요. 75년 그 상황을 우리 김상진 열사는 바로 검은 공기를 체득하신 분, 단테 시인의 경지에 올라가셨던 그분을 우리가 묵상하면서 제가 신학도로서 함께 나누고 싶은 내용들, ‘부활은 무엇인가?’입니다. 제가 신학생들과 세미나 할 때 대만의 개신교 목사 송천성 목사님이 하신 말씀을 자주 하는데요. ‘부활이란 환생이 아니다. 부활은 고통을 껴안는 것이다. 고통의 수락, 십자가의 수락, 민족의 아픔을 수락하는 것이 바로 부활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고통을 수락하면서 우리에게 부활을 확인시켜 준 김상진 열사를 마음 위에 모시면서, 모든 희생자들을 마음 위에 모시면서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고 가족의 행복, 남북의 일치와 화해를 지향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