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권 이야기농업연구소장, 농생물 79
[2024년 10월 16일] 김상진학형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산업의 역군이라고 하지만 공부만 하고 있을수는 없다.”
“김상진 학형을 위해 뭔가를 해야한다.”
엄혹했던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시절. 1975년 4월 15일, 공릉동 서울공대 캠퍼스, 김상진에 대한 묵념과 만세삼창 등 즉석 추도식이 거행되었고 시위참가 인원은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1975년 4월 11일, 수원 서울농대 캠퍼스에서 축산과 김상진이 할복자결하고 12일 오전 서울대병원으로 올라가는 구급차 안에서 운명한 사흘 뒤에 벌어진 역사이다. 농대에서 오구균, 이춘만, 기명능 등이 양심선언문을 복사해서 서울로 올라가 공대팀들에게 전달했다. 이 사건으로 73학번 7명이 제적된다.
서울종로 문화공간 온에서 서울공대 김상진추모식 및 학생운동 주역들 인터뷰를 진행했다.
참석자는 이래경(금속공학 73), 양태열(조선공학과 72), 윤조덕(기계공학과 69), 최동남(전자공학과 73)이고 안병권 위원장이 인터뷰를 맡고 장영철 PD가 촬영을 맡았다.
5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에서는 열사의거 전후좌우 상황을 집중취재하여 백서에 담아내고 영상기록으로 정립하는 작업을 진행 중인데 그 일환으로 4.15 서울공대 추모시위 주역들을 만난 것이다. 4월 12일부터 15일까지의 연결고리와 서울공대 추도식의 의미를 당시 주역들로부터 길어 올리는 작업이다. 또한 그 사건 이후 삶을 어떻게 살았고, 김상진 열사가 그들의 삶 속에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후세대들에게 남기는 메시지를 영상으로 담았다.
김상진의 삶과 죽음을 기록하면서 파고들면 들수록 열사의 조국의 민주주의를 향한 피맺힌 지향은 외롭지 않았고, 분절되지 않고 마디마디 연결되어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2024년 12월 16일] 열아홉 김상진, 스물여섯 김상진을 만나고 왔습니다.
죽은 자가 산자를 돕는다. 그렇다면 산자가 죽은 자를 도울 수는 없을까?
과거가 현재를 돕는다. 그렇다면 현재도 과거를 도울 수 있을터.
상진이 형을 만나고 왔습니다.
담양에서 아주 의미 있는 이벤트, ‘김상진과 한얼 그리고 푸른여관’이란 콘셉트로 인터뷰 및 스케치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영화를 만들고 백서를 제작하면서 끝내 아쉬웠던 부분 중 하나였던 상진형님이 돌아가시기 전 한 달여 저간의 상황과 ‘푸른여관’으로 일컬어지는 한얼 공동체 속에서의 이야기들을 채록하는 일입니다. 참석자는 최철(67), 오구균(73), 권오섭(74), 신윤태(74), 이충교(74) 선배로 서로 몇십 년 만에 처음 보는 분들이 계시기도 합니다. 제가 인터뷰를 담당하고 촬영은 장영철 PD가 맡았습니다.
서울 신윤태(74) 선배와 평택이 집인 권오섭(74) 선배는 김포에서 내려오는 장영철 PD 차로 내려오고 저는 김제에서 출발했습니다. 고창에서 최철(67) 선배와 광양에서 이충교(74) 선배가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담양에 사는 오구균(73) 선배가 호스트로 모든 여정을 감당했습니다. 7명의 ‘현재(現在)’가 모였을 때 상상 속의 상진이 형이 밝은 얼굴로 들어왔습니다. 카페 ‘행성리여행’ 2층 특별실에서 상진이 형은 써클 한얼 멤버들의 공동 자취방이자 학습교양공간 1975년 ‘푸른여관(수원시 서둔동/ ㅁ자형으로 이전여관 했던 방들을 자취하숙방으로 개조)’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습니다. 김상진 열사는 푸른여관 한얼팀 살림을 맡았던 총무 신윤태와 자신과 2인 1조 같은 방을 썼던 권오섭을 통해서 후욱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1975년 4월 11일의 할복 의거가 그냥 갑자기 실행된 일이 아니라 ‘스물여섯의 옹골진 삶’ 전체가 담긴 ‘의지’의 발현’이라는 것을 새삼스러워했습니다. 전날밤(4월 10일), 후배 권오섭에게 읽어보라며 ‘양심선언문과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건네주고 ‘아 명문장이네요’ 감동하던 룸메이트의 모습을 보고 밤새 뒤척이던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할 때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다친 다리의 기브스 막 푼 권오섭을 부축, 동행하여 대강당 옆 계단에 데려다 놓고 잔디밭 집회현장으로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는 모습….
1년 선배 최철 선배는 눈앞에 보듯 68년도 입학한 김상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으며 68년 한얼 여름수련회 사진 두 장을 가지고 왔습니다. 뒷줄 우측에서 다섯 번째, 대학 신입생 김상진을 만났습니다. 그로부터 7년 후 벌어지는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입니다.
나는 사진 속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상진이 형을 돌려세워 깊은 포옹을 했습니다.
인터뷰를 시작했고 선배들이 상진이 형을 소환했고, 만났고, 그리워했습니다. 선배들의 일관된 삶결에서 상진이 형이 남은 자들을 돕고 있는 게 분명했습니다. 오구균 선배는 한얼의 인장, 회의자료, 메모노트 등 중요한 자료와 기억을 가져왔습니다. 다섯 분은 일어나서 ‘한얼가’를 멋지게 불렀습니다. 아, 아닙니다. 최철 선배 옆에 상진이 형도 같이 있군요. 여섯이 불렀습니다.
자유의 젊은 날개야 젊은날개야
조국의 푸른 하늘로 푸른 바다로
우람찬 뜻을 안고서 뜻을 안고서
다같이 높이 날으자 높이 날으자
오 민족흥망이 오늘에 있구나
정열로 뛰는 심장에 피곤이 있으랴
촬영팀은 이 노래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선배들은 지난 50년의 세월과 한얼의 역사, 김상진에 대한 부채감. 그리고 조국의 민주주의 역사 제단에 몸을 바친 열사에 대해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영화 <1975.김상진>을 만들 때도 그랬지만 상진이 형을 만나는 날은 아릿하면서 동시에 잘살아야지라는 마음에 뜨거워집니다. 산자로서 역사에 아로새겨진 형님을 어떤 방식이든지 돕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하늘에 계신 형님과 나는 서로 돕고 돕는 게 분명합니다.
오늘 여정에 함께해 주신 선배들과 장영철 PD에게 감사 인사드립니다.



[2024년 12월 17일] 어떤 응원
오후 6시 반, 전화가 왔다. 67학번 조봉환 선배이다.
– 여보세요.
– 어 잘 지내지? 지금 어디야?
– 예, 어제 늦저녁 김제 집에 들어왔어요. 그렇지 않아도 어저께 담양 한얼모임에서 형님 얘기 많이 나눴습니다.
– 잘했네. 그렇게 하고…. 지금 돈은 잘 걷히냐? 얼마나 들어왔나?
– 학번별로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예상보다는 좀 못 미치고 있어요.
– 어려울 거야. 요새 다들 어렵고 또 이 지도적인 사람들이 다 돈을 못 버는 영감들이 돼갖고…. 나도 벌이가 없는지가 오래 돼서. 하여간 내가 500만 원만 넣을 테니까….
– 무슨 말씀이십니까? 참 이게 참…. 엎드려서 소중히 받겠습니다.
한참 한얼모임 관련자료 정리하고 영상콘텐츠 만드는데 뭉클하고 감정이 이어 오른다. 10시가 넘었지만 봉환 형님께 전화드렸다.
– 아까 형님 전화받고 제가 50주년준비위원장 하면서 처음으로 울컥했어요. 결정적일 때 큰 도움 주셔서요. 내심 준비위원장으로서 어깨가 무거웠거든요. 이게 제가 취재하고 촬영하고 글 쓰듯 듯 맘대로 되는 일도 아니고요.
– 큰 도움이 아니네.
– 아이고 무슨 말씀을요, 흐름이라는 게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이런저런 이유로 여건이 안 되는 경우가 왕왕 있잖아요. 그런데 어제오늘 한얼 선배들과 형님 말씀 듣고 힘을 내겠습니다.
– 내가 늘 하는 얘기지만 욕심부리지 말고, 작게 해도 계속하는 게 중요한 거야.
– 알겠습니다. 지금 자료 정리하는 중인데 한얼 선서하고 한얼 노래가 참 예쁘고 멋있네요.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 들려줘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아요. 작업하다가 아까 형님 전화가 자꾸 생각이 나서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씀드리려고요. 힘내서 매듭 잘 짓겠습니다.
어제, 오늘. 참 기분이 좋다.
[2024년 12월 27일] 형님, 이 나라에 ‘소리 없는 뜨거운 갈채’를 보내주세요
“저 민족의 들리지 않는 피맺힌 절규가 무엇을 뜻하며 간절한 무언의 호소가 무엇을 바라는 가를 왜 각하는 모르시는 것입니까? 죽음으로써 바라옵나니, 이 조국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에서 바라옵나니, 국민된 양심으로서 진실로 엎드려 바라옵나니, 더 이상의 혼란이 오지 않도록 숭고한 결단을 내려 주시길 바라옵니다. 이 땅에 영원한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갈망하는 우리 민족의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어떠한 압력에도 끝없는 투쟁을 계속하여 싸워 이겨 나갈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각하의 안녕과 건강을 축원합니다. 1975년 4월 10일.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축산과 김상진”
이호선 선배가 촬영 끝부분에서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낭독했다.
시대가 김상진형을 소환하고 있다. 아니다. 50년 전, 박정희 유신정권의 폭압에 맞서 학내 집회시위 중 할복자결로 항거한 스물여섯 청년학생이 지금 청년들과 우정과 연대를 나누는 것이다.
SBS 시사교양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제작진에서 연락이 와 진행된 인터뷰 일정이다. 강남 눅스튜디오플레이스에서 상진형 큰 형님 김상운 형님과 보성고, 대학 친구 이호선 선배 인터뷰였다. 오후 4시 반부터 7시까지. 꼬꼬무 제작진은 카메라 4대의 각으로 2시간 반 동안 촬영했다. 꼬꼬무 김상진 열사 편은 두 달여 제작과정을 거쳐 방영될 예정이다.
인터뷰 마치고 인근 식당으로 옮겨 송년회 겸 조촐한 술 한잔. 김상진 열사 50주년기념추진위에서는 정근우 회장과 박석두 선배, 장영철 PD와 내가 참석했고 큰형수님이 함께 김상진 열사의 살아생전과 이후의 시간을 반추했다.
5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장이자 <1975.김상진> 감독으로서 내년 50주년 이전에 김상진 열사 9남매 ‘가족 상영회’를 민주시민들과 함께 서울에서 진행하자는 제안을 드렸다. 열사의 누님 (고)김영자 님 외손녀 백승이 양과 두어 달 전부터 내심 마음먹고 있는 일이기도 했다. 큰형님, 큰형수님도 흔쾌히 맞장구치셨다. 남은 8남매와 손주·손녀까지 내려온 50년의 시간과 공간, 지금 K-혁명, K-민주주의 흐름과 맞물려 시민들과 함께 그간 조금은 놓치고 지냈던 ‘김상진을 역사로’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2025년 1월 15일] 대한민국 ‘살아있는 민주주의’를 만나고 왔습니다.
그분과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뒤에는 안중근 의사가 계셨고 내면으로는 김상진 열사가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나는 안중근의 ‘몸’으로 들어갔고 함신부님의 ‘마음’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김상진의 ‘지향’ 속으로 뛰어갔습니다. 함세웅 신부님은 1942년생이지만 청년 같은 ‘활기참’으로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김상진 열사 5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에서는 김상진 열사와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분들을 찾아 말씀을 듣고 영상으로 남기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1975년 4월 18일, 명동성당에서 김상진 열사 추모미사를 집행하시고 역사의 고비마다 청년·학생 열사 김상진을 아로새겨 주신 함세웅 신부님을 인터뷰 촬영했습니다. 촬영한 장면 중에서 해맑은 신부님 한 컷은 2025년도 기념사업회 기관지 ‘선구자’ 표지모델로 모시고 영상 인터뷰 채록은 김상진 영상실록으로 정립됩니다.
50주기 영상촬영팀은 신부님의 환대 속에 작업을 마무리했고, 책 사인도 받았고 기념촬영도 했습니다. 젊은 촬영감독들과 작가는 평소 존경하는 함 신부님을 눈앞에서 뵙고 이야기 나눈 사실에 연신 싱글벙글입니다. 그들에게 평생 살아나갈 힘이 될 것입니다.
[2025년 1월 19일] 50년 전 김상진 열사 할복의거 현장 육성원본(카세트테이프)을 찾았습니다.
민주주의가 된 청년 김상진
다시점, 원근시점으로 김상진 열사를 만나는 요즘입니다.
토요일 전국에서 윤석열 구속투쟁이 시민들 마음을 뜨겁게 달구는 날, 저와 장 PD는 부산시민운동지원센터 6층 회의실에 다녀왔습니다. 1975년 열사 할복의거 당일 벌어진 역사와 1970년대 전반기 농대학생운동의 흐름, 그리고 4월 12일 오전 8시 55분 서울대병원으로 올라가는 구급차 안에서 운명하시고 서울대병원에서 벌어진 상황들(간이추도식과 가족들의 아픔), 박정희정권에 의한 시신탈취, 강제 화장 순간까지 당시 현장에 있었던 선배들 인터뷰를 채록했습니다.
참석자는 김정주(농경제 67), 차성환(73), 설동일(75), 김태홍(73), 황연수(72), 이종식(72).
숨 가쁘게 전개된 50년 전의 그날, 그날들을 영상기록으로 잘 담고 왔습니다. 영상인터뷰기록들로 인해 퍼즐이 하나둘 맞춰지고 있습니다. 50년이라는 시간의 의미를 넘어 ‘공간과 지향’까지 담은 ‘민주주의가 된 청년 김상진’을 기록하고 재구성하는 일. 5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장이자, 1970년대 마지막 학번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다시 마음먹고 있습니다.
지금 다시 민주주의, 윤석열과 김건희 처단 및 반민족·반헌법·반민주세력을 뿌리 뽑는 ‘또 다른 투쟁’입니다.
헤어지기 전 카페에서 태홍 선배가 손을 내보이면서 툭 한마디
“이 손이 상진이 형 피 묻은 손이야. 할복한 상진이 형을 들쳐업고 택시에 태워 수원도립병원으로 갈 때 묻은 피…. 왠지 드러내고 싶지 않고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애써서 감추고 누르고 살았는데 지난번 다큐영화 시사회에서야 마음이 열렸네.”
나는 태홍이 형의 마음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뜻깊고 기쁜 일. 50년 전 상진이 형의 육성 원본 테이프를 만날 듯합니다. 태홍선배가 의거현장에서 양심선언문과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수습하고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김의장(72) 선배에게 맡겼고, 그 선배는 딸에게 잘 보관하라 맡긴 극적인 상황이 연결·확인되었습니다. 늦은 밤 김제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차성환 선배 전화입니다.
“안감독, 의장 선배 따님이 그거 잘 갖고 있고, 안감독이 전화하면 인터뷰도 응해주실 것이네.”
순간 울컥함이 올라옵니다.
50년 전 상진이 형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니.
의장 선배에게 전화드리고 일정을 잡아 댁으로 찾아가 선배와 따님으로 연결된 그 묵직한 마음을 인터뷰할 생각입니다. 테이프는 전문가에게 맡겨 상태를 점검하고, 가능하면 현재 음원으로 재생하려고 합니다.
윤석열이 구속돼서 뜨겁고, 상진이 형 육성 원본으로 더 뜨거워집니다.


[2025년 1월 20일] 김상진 열사 육성원본 50년 만에 빛보다
흐느끼고 말았습니다.
4분이라는 시·공간에 지난 50년의 울림, 떨림, 기쁨이 가득 뛰어 들어왔습니다.
김상진 열사 할복의거 현장 양심선언문 낭독 육성원본 카세트테이프(1975년 4월 11일 녹음본)를 재생하고 디지털 음원으로 전환했습니다.
서울 송파 김의장(원예 72) 선배 댁을 방문해 인터뷰하고 50년간 보관해 오던 김상진 열사 육성 원본 테이프를 기증받았습니다. 장영철 PD가 동행해 촬영을 맡아주었습니다.

용산에서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와 USB를 구입해 김제 집으로 내려와 테이프 재생작업에 돌입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작동하지 않은 것이라 안 나오면 어쩌나…. 조심조심, 혹시 모를 상황이 염려하며 앞면을 다 돌렸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입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고 초조했습니다. 뒷면으로 돌려 다시 재생 버튼을 꾹 누르는 순간, 상진이 형이 살아생전 스물여섯 청년학생으로 제 앞에 홀연히 나타나셨습니다.
유명한 서울농대 수원캠퍼스 미공군 전투기 소음이 두 차례 지나갑니다. 이래저래 혼잡하고 분주한 현장 분위기(당시 300여 명 학우들의 반유신집회)가 고스란히 전해져 옵니다.
마지막에 칼로 할복하는 순간 놀라 소스라치는 학우들의 비명 소리를 끝으로 테이프 녹음은 끝납니다.
총길이 4분여. 양심선언문이 ‘육성 완전체’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만세! 만세! 만세!!” 나는 삼창 했습니다.
우리가 열사 육성으로 알고 있는 것은 1975년 기독교방송(CBS)에서 송출한 방송분으로 1분 20여 초짜리입니다. 저도 다큐 <1975.김상진> 제작할 때 그 육성이 최종이라는 결론을 가지고 작업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정이 있어 끝부분 1/4만 녹음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녹음이 진행된 것을 방송국에서 잡음이나 소음빼고 시간을 고려하여 편집 방송한듯합니다. 몇 마디는 양심선언문에 없거나 다른 내용도 있고 중간중간 호흡을 가다듬는듯한 터울도 있습니다.
열사가 읽은 내용을 텍스트로 정립하고 전체 원본을 공유하겠습니다. 이 의미로운 역사를 생성케 한 김의장 선배와 그 따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촬영을 마치고 선배가 테이프를 기증해 주셨습니다. 두 손이 떨렸습니다. 덕분에 김상진 열사 50주년 기념사업이 풍성하고 깊어졌습니다.
이 땅의 영원한 민주주의 푸른 잎사귀가 번성하도록
오랫동안, 김상진
.
안병권_ 이야기농업연구소장, 농생물 79, 인문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농민들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으로 홍보하는 것을 돕는 ‘이야기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2007년 『도시와 통하는 농촌 쇼핑몰 만들기』, 2011년 『이야기 농업』, 2015년 『스토리두잉』 등 세 권의 책을 펴냈다. (ecenter@naver.com)
Last modified: 2025-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