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해방에서 촛불까지/기억하고 기리고 소망하다’에서 함세웅 신부는 “역사에 헌신했던 사람들을 기억하고, 과거를 현재화시켜 시대의 정신을 벼리기 위해 붓글씨로 ‘역사기도’를 써보자는 결심이 섰습니다. 우리 민족이 걸어온 지난한 길을 한 글자 한 글자 옮기면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 기도합니다. 붓을 잡기 전에 늘 기도하지만, 이제는 붓글씨가 곧 기도이며 나아가 미래를 향한 길잡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선열들이여, 이끌어 주소서. 아멘!”이라고 기도하고 있다. 김상진 열사를 기리는 25장 ‘자유를 질식시키는 공포의 병영국가’에서는 ‘공포의 병영국가를 종식시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친 김상진 열사의 결단과 호소를 깊이 묵상’하는 기도로 김상진 열사를 비롯한 당시의 모든 청년‧학생 열사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김상진 열사 의거 5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는 김상진 열사에 대한 역사적 위상을 가장 잘 알고 계신 함세웅 신부를 만나 김상진 열사와 함께하신 그 마음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인터뷰는 김상진 열사 5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장 안병권 위원장이 진행했으며 50주년 영상촬영팀이 함께 자리해 인터뷰를 촬영, 기록했다. (편집자 주)

안병권 김상진열사 5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장(이하 안병권) : 50주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김상진백서 준비 중에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기도’를 읽었습니다. 김상진 열사와 함께하신 그 마음이 뜨겁게 와닿았습니다. 김상진 열사에 대한 신부님의 시선을 영상과 기록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1975.김상진> 감독 입장에서 보면 김상진 열사의 전체적인 삶과 이후에 남겨진 지난 50년의 삶 여정에서 함세웅이라는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존재가 늘 투영돼 있었기에 꼭 모시고 싶었습니다. 불쑥 전화드렸는데 이렇게 인터뷰와 촬영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함세웅 신부(이하 함세웅) : 아 천만의 말씀을요. 반갑습니다.
존재의 이유이자 바탕이 되는 신앙, 참되게 살아야 된다는 가치
안병권 : 편하게 여쭙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에 헌신해 오신 열정은 저희 시민들이나 후배들에게 무한한 존경의 대상인데요. 그 열정은 어떤 신학적 토대 또는 철학적 토대에서 기인한 건지, 신부님의 활동과 실천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건이나 계기가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함세웅 : 신앙이 저에게는 존재의 이유 그리고 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한 표현으로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그러는데 그 이름이라는 것이 무슨 명성이라기보다는 ‘참되게 살아야 된다’는 가치라는 것을 선생님들께서 늘 말씀해 주셨어요. 그리고 예수님의 삶이라는 게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의 의미가 하늘과 올바른 관계 정립, 또 좌우 평등의 사상을 지녀야 된다는 것이라는 교훈을 배웠어요. 그러면서 성장을 하고 1957년 소신학교(성신고등학교)라는 사제 양성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했죠. 1960년 4.19 혁명 때 가톨릭 대학교 1학년이었어요. 그런데 신학교 생활은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다 보니 저희들은 밖에 나갈 수가 없었어요. 4월 26일 아침에 낮 12시 기도를 바치는 시간에 학장 신부님이 들어오셔서 ‘오늘 아침 10시 반에 이승만 대통령이 사퇴했다. 너무너무 기쁘다’ 그러시면서 ‘경무대 앞에서 숨져간 그 청년‧학생들, 소년들 이분들이 우리들에게 민주주의를 찾아다 준 은인들이다. 이분들을 기억해야 된다’ 그렇게 설명하시면서 예수님의 별명이 불사조라고 하셨죠. ‘불사조는 이집트에 나오는 신화의 새인데 500년, 천년을 사는 새가 죽을 때 자기가 태어난 둥지에 와서 자기 몸을 막 비비면서 열이 나면 깃털에 불이 붙어서 죽는 거예요. 그 죽는 새 속에서 재가 생기고 그 안에서 알이 생겨나면서 알이 터져서 새로운 불사조가 된다, 하늘로 높이 날아간다. 그래서 자기 몸을 태워서 생명을 이어 주기 때문에 그 이름이 페닉스 불사조이다. 경무대 앞에서 숨져간 우리 청년‧학생들 시민들이 우리에게 민주주의 자유라는 선물을 주고 떠나가셨다. 그분들이 우리 시대 불사조다.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감사 기도를 올리자’라고 말씀하시고 크게 성가를 불렀어요. 대학교 1학년 때 들은 그 강론 말씀이 저에게 막 가슴에 와닿았어요. 이후 로마에 가서 신학 공부할 때 불사조가 나오는 거예요. 대학교 1학년 때 들은 게 있으니까 더 열심히 공부했죠. 또 신학교에서 강의할 때 저도 학생들에게 불사조 얘기를 했었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으로 만난 김상진 열사
함세웅 : 1973년에 귀국하고 연희동 성당 보좌 신부였을 때 전 김대중 대통령이 납치되고, 74년에 긴급조치가 발동되면서 백기완 선생님, 장준환 선생님 등 많은 분들이 구속되고 또 민청학련 사건에 많은 분이 구속되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신부로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고민고민하고 있는 터에 그전에 구속되신 박형규 목사님이 재판받는 내용들이 보도가 되더라고요. 기사를 보면서 목사님들은 참 대단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74년 7월에 지학순 주교님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신 거예요. 우리 주교님이 구속됐으니까 우리가 안 움직일 수가 없었죠. 또 우리 학교의 스승이기도 하셨고요. 그래서 저희들이 모여서 결성한 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었어요.
김수환 추기경님과 함께 많은 주교님들, 사제들과 함께 사제단을 결성하면서 기자들도 만나고 세상을 더 알게 되었죠. 그다음 75년 4월에 인혁당 관계자 8분이 4월 8일에 사형 언도를 받고 4월 9일에 사형을 당하신 거예요. 너무 가슴이 아팠죠. 우리가 그분들 장례도 치르고, 가족들도 만나고,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그 때문에 저희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중앙정보부 5국에 끌려갔어요. 갖은 수모와 모욕을 당하고 정신없이 나왔는데 김상진 열사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서 유신헌법 반대를 외치면서 자결하셨다는 거예요. 서울대학교 출신 선배 신자들이 그 소식을 전해주면서 지금 장례를 못 치르게 하니까 명동성당에서 장례를 치러야 된다고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어떻게 진행할지 고민하면서 가톨릭 학생회 주관으로 18일에 명동 성당에서 소수가 모여서 장례 미사와 추모 미사를 봉헌했어요.
이후 제가 당시에 대변인을 맡고 있던 민주회복국민회의 이름으로 국민장 형식으로 치르기로 했죠. 김상진 열사 장례 추진위원회를 구성해서 4월 22일에 명동 성당 문화관을 빌려서 장례 추도 미사와 기도식을 거행하기로 하고 윤보선 전 대통령 등 많은 원로분들 초청하고 오시기로 해서 준비를 잘했습니다. 그런데 당일 명동성당 일대를 완전히 차단해서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는 거예요. 사제들만 성당에 들어올 수 있었는데 우리 신부님들과 원로 몇 분이 들어오셨어요. 그래서 그분들 중심으로 약식으로 기도회를 올리고 장례를 올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김상진 열사가 그때 청년‧학생인데, 뵌 적도 없지만 유신제도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목숨을 걸었다는 게 저희들을 움직인 거예요.
‘예수의 희생’과 같은 ‘공동체를 위해 불의에 맞선 죽음’
함세웅 : 그 배경에는 제가 로마에서 유학할 때 경험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1965년에 로마에 유학 가서 한 8년 공부했는데 67년에 체코슬라바키아 청년‧학생들이 민주화 운동을 펼치는데 소련이 점령해서 탱크가 들어왔어요. 그때 청년‧학생들 몇 명이 소련 군대에 항거하면서 자결했어요. 우리 가톨릭 교리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안 된다라는 교리가 있어요. 그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했는데 당시에 교황 바울 6세 교황님이 주일날 바티칸에 나와서 순례자들에게 강론하시는데 그 체코에서 숨져간 청년‧학생들 이름을 열거하면서 추모하는 거예요. ‘내가 이분들을 추모하는 이유는 이분들이 죽음을 택한 그 방법은 내가 다 동의하지 않지만 인간의 품위와 자유를 위해서 체코 민중의 자유를 위해서 소련 탱크에 저항하면서 자기 목숨을 바쳤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가 체코의 자유를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 이런 말씀을 해 주신 거예요. 제가 깜짝 놀랐어요. 교황님의 말씀이 힘이 있잖아요. 그래서 ‘아, 이렇게 공동체를 위해서 불의에 맞서 자기 목숨을 끊을 때는 비록 교리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희생과 헌신의 의미가 있구나’를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태일 열사도 그렇게 해석을 했는데 김상진 열사가 그렇게 목숨을 끊으셔서 ‘이분을 위해서 우리가 기도해야 된다. 이분의 뜻을 우리가 되새겨야 된다. 또 청년‧학생들의 열정을 우리가 간직해야 된다’ 이런 뜻으로 제가 과감하게 명동 성당에서 추모 행사를 가질 수 있도록 결정을 했고 우리 신부님들과 함께 또 민주회복국민회의 임원들과 함께 결정을 하면서 일을 했는데 원천 차단되어서 뜻있게, 장엄하게 펼치지 못했어요. 이후 장례식을 거행했던 기억이 있고 그런 의미에서 제가 김상진 열사를 비롯해서 그 당시에 민청학련 학생들에게 대한 역사적인 빚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제가, 우리가 지학순 주교님 때문에 역사 현장으로 나오긴 했지만, 우리 사제들을 역사 현장으로 초대하고 이끌어준 분들은 그 당시에 74년 75년에 청년‧학생들이었죠. 그분들이 성당에 있던 우리 사제들을 역사의 현장, 민중의 현장, 우리 삶의 현장으로 초대했습니다. 이분들의 헌신에 늘 고마움을 느낀다고 제가 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간 공의회, 담속의 교회를 세상 속에 뛰어드는 교회로 만들다
안병권 : 예. 사제단의 성격이 지금 말씀하신 데 그대로 다 녹아 있는 거네요. 지금도 신부님들, 사제단에서 어떤 선언이 나오면 울컥하는데요. 그 사제단의 성격이 말씀하신 내용에 포함된 건가요? 또 추가하실 말씀은 없으신지요?
함세웅 : 추가로 한다면 가톨릭 교회가 1960년 이전까지는 세상과 결별을 했어요. 담 속의 교회예요. 그때의 교리는 이 세상은 우리의 원수다. 우리 육체도 원수다. 육체를 극복하고 세상을 끊어버려야 된다. 마귀도 원수다. 그래서 세 가지 원수 삼구라고 그랬어요. 마귀, 세상, 육체가 원수예요. 그러니까 세상을 등진 교회, 담 속의 교회가 된 거죠. 그런데 1960년대에 요한 23세 교황이 ‘바티칸의 창문을 열어라. 세상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게 해라. 세상을 껴안는 교회가 되어야 된다.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야 된다’ 이렇게 선포하면서 교회가 변화된 거예요. 그 내용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라고 그래요. 가톨릭 교회가 쇄신하고 변화되고 역사와 함께, 민중과 함께,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다음에 우리가 좋은 일을 할 때 손발이 움직이지 영혼이 움직이는 게 아니잖아요. 그럼 이 육체가 어떻게 원수냐, 육체가 움직여서 선행을 하는 것이다. 마귀는 물론 원수지만 ‘세상과 육체는 우리의 벗이다. 하느님 은총이다’라는 뜻으로 신학적 해석이 180도 바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이제 ‘세상 속에 뛰어 들어가는 교회가 되자, 세상 한복판이 교회다’라는 그러한 교회가 설정이 되었어요.
지학순 주교 구속으로 태동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 그러던 터에 한국에서도 큰 역사 변화 바람이 일어났었는데 세상과 함께하는 변화 속에서 지학순 주교님이 원주교구에 계시면서 1970년 원주문화방송을 설립하는 데에 40% 지분을 갖고 참여하셨습니다. 방송을 통한 복음 전파와 지역사회 언론 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하고, 김지하 등 의식있는 청년들을 지원했는데 박정희 일가 친척이 부정부패를 일삼은 거예요. 그래서 원주 문화방송을 둘러싼 부정부패를 일소하자, 그래서 항거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유신 체제가 되고 또 73년부터 긴급조치가 발동되면서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니까 가톨릭에서도 ‘야, 이건 아니다. 주교가 법 절차 없이 구속되는 이런 사회라면 우리가 움직여야 되지 않냐’ 이러면서 사제들이 모이게 되었죠. 마침 또 성년(聖年)이라고 가톨릭교회가 기도하는 한 해였어요. 7월 5일 김대건 신부님 축일을 맞이해서 한국 천주교 주교단에서 ‘교회는 세상을 변형시키는 원동력이 돼야 된다’ 그런 취지의 메시지가 있었어요. 당시 많은 분들이 구속되셨으니까 저희들이 명동에서 철야기도를 바치게 된 것이죠. 철야기도를 바치면서 ‘우리가 세상을 변형시키는 것이 교회의 선교 사명이다’라는 걸 깨닫게 된 거예요.
그런데 그날 밤 김재규 중앙정보부 차장 주선으로 김수환 추기경님과 박정희 대통령 긴급 면담이 진행됐어요. 그 3시간 만에 지학순 주교님이 나오시게 되었어요. 우리는 철야기도를 계획했는데 그러니까 조금 힘이 빠졌잖아요. 그런데 그때 깨달은 가르침이 ‘우리가 지학순 주교님 한 분 만의 석방을 위해서 모인 게 아니지 않냐, 많은 목사님들, 민주 인사들, 교수들, 청년‧학생들이 감옥에 계신데 지학순 주교님 한 분이 나왔다고 기도회를 그만두면 그건 교회의 소명을 포기한 거다. 그건 이기적인 존재다’라는 생각이었죠. 교회는 이타적인, 타인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신학적 반성, 깨달음이 있으면서 철야기도를 계속하고 그때부터 매주 월요일에 명동 성당과 각 성당에 모여서 기도회를 시작하게 된 것이죠. 그렇게 한 달, 두 달 지나면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하게 된 것이죠. 다양한 이름이 많이 나왔어요. 정의, 평화, 통일, 민주, 인권, 자유 등등 많이 나왔는데 ‘이 시대에 시대정신은 정의’라는데 의견이 모아졌죠. 지난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50주년 행사를 가졌습니다.
저희 세대가 말하자면 1세대라고 그래요. 지금 세대를 3세대쯤이라고 표현하는데 50년이니까 저희 안에도 우여곡절 참 많았어요. 신학적으로 해석을 덧붙이자면 저희들은 그 어려운 시대 때 자생적으로 생긴 거예요. 50년 살아오면서 저희들이 교회 안팎에서 많은 박해를 받았어요. 그런데 박해를 받아오면서 기뻤던 거는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박해를 받으셨거든요. 유다 종교로부터 박해를 받으셨고, 그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 사회 지도자들에게 박해받으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어요. 그 박해받는 삶이 바로 십자가 예수님의 뒤를 가장 아름답게 따라가는 삶이다, 이렇게 확신하면서 기쁘게 여기까지 와 있고 우리가 바로 천주교를 역사적으로 대표하는 그러한 모임이다라는 긍지를 가지면서 지내오고 있습니다.
안병권 : 제가 79년도에 대학 입학을 했는데요. 물론 선배들도 그랬지만 천주교 신부님들이 저희들에게 주었던 힘이 참 컸습니다. 소수였고 맨날 쫓기는 입장이었는데 밀리다가 갈 데가 없으면 명동 성당이나 근처에 있는 성당 한번 바라보고,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이 한 말씀 딱 해 주시면 또 바짝 힘이 났고요. 모여서 술 한잔 하면서도 또 신부님들이, 가톨릭이 이렇게 움직이셨던 양식들을 아주 가슴 깊이 품고 살았는데요. 다시한 번 감사 말씀드립니다.
함세웅 : 아이 고맙습니다. 여러분들의 선배, 청년‧학생들이 저희들을 현장으로 초대한 분들이에요.

김상진 열사 자결은 새로운 순교
안병권 : 50년 전에 김상진 열사가 드물게도 할복으로 돌아가시잖아요. 김상진 열사의 할복 투쟁이 지금 한국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어떠한 존재로 기억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신부님이 음으로, 양으로 또 공개적으로, 비공개적으로 쭉 현장에 계시면서 느꼈던 소회를 좀 말씀해 주십시오.
함세웅 : 그 당시에 김상진 열사의 녹음을 들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죠. 또 저희들하고 6, 7년 정도 차이니까 같은 세대 분이 아니겠어요? 우리보다 조금 후배이긴 했지만 청년이 그렇게 노력해서 대학에 갔는데 자기 목숨을 끊는다는 건 참 대단 대단한 선택과 결단인데요. 우리 사제들도 사제가 될 때는 순교의 각오를 한다고 그러는데 ‘아, 어떤 의미에서 이런 분들의 각오가 순교적 결단이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당시에 전태일 열사와 김상진 열사 두 분이 우리 가슴에 늘 남았었는데 이분들의 결단을 지켜보면서 ‘이게 새로운 유형의 순교다, 새로운 순교다’라는 생각에 순교와 연결 지으면서 묵상을 했죠. 그다음에 그분이 남긴 유서 내용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한테도 아주 깍듯하게 존칭을 쓰면서 호소했던 내용도 있고, 또 우리 청년‧학생들, 시민들에게 주는 좋은 메시지가 있는데요. 그 시대가 병영국가로 변질이 되었잖아요. 자유를 짓누르는 병영국가를 바로 자유의 숨결로 바꾸자는 호소와 열성, 그거는 사실 절규지만 아름다운 기도, 또 희생, 제물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그 당시에 저도 30대였기 때문에 그런 사건을 들으면 그냥 막 가슴이 뛰는 거예요. 인혁당 분들의 사형 소식 들었을 때 온몸이 저리고 아프고 그런 체험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분들의 죽음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바로 박정희를 꾸짖는 것이고 유신 체제에 우리가 답하는 것이다. 어쨌든지 이런 분의 귀중한 선택을 우리가 기억하고, 또 기리고 뜻을 함께하자. 이러면서 명동 성당에서 추모식을 하도록 결정하게 된 거였죠.
배신의 존재 박정희를 끊어내야 민족정신 이룩할 수 있어
안병권 : 대구 광장에 박정희 동상이 세워지고, 홍준표 대구시장이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열사가 유신 체제에 맞서서 보여준 희생을 욕되게 하고 있는 건데요. 이러한 역사적 해석의 갈등이 지금 윤석열 탄핵 국면에도 마찬가지로 극심하게 드러나고 있는데요. 지금 우리 세대는 어떤 태도로 이 상황을 맞이해야 되고, 끝까지 잃지 않고 가야 될 민주주의 가치는 뭐가 있을까요?
함세웅 : 저는 그런 분들, 홍준표 대구시장을 볼 때 참 마음이 아파요. 그 사람이 고려대학교 나와서 나름대로 법을 공부하고, 처음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도 갖고 정치 생활을 하려 했다고 그러고 또 검사 생활 때 나름대로 조사를 잘한 일도 있을 텐데요. 경남도지사도 하다가 대구시장까지 왔는데 느닷없이 박정희 동상을 대구역 앞에다 세웠다고 하는 보도를 보는데 또 자기 모습과 비슷하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참 추하구나, 자식들 가족들에게 아름다운 홍준표의 모습을 남겨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분노보다 좀 슬프다고 할까? 딱해요. 지금 이런 모습이 고려대학교에서 법을 공부했던 청년‧학생의 뜻이었을까라는 의문이 들면서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아라’는 말로 좀 호소하고 싶어요. ‘청년 시절, 10대 시절 때 아름다웠던 그 마음, 순수한 마음 그걸 좀 묵상을 해라. 그걸 좀 찾아라. 그리고 후배들에게 그런 가치를 전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제가 좀 호소하고 싶네요.
안병권 :김상진 열사의 대척점에서 박정희라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는데요. 경상북도 쪽에 가면 여전히 박정희에 대한 숭모하는 마음이 굉장히 강렬하거든요. 이게 언제쯤 정리(?)가 될까요?
함세웅 : 그게 참 한계인데 우리 현대사에서 저와 함께 우리 청년‧학생들 시민들이 다시 한번 되돌아볼 일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어요.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역량에 의해서 남북으로 분단되었어요. 항일 투쟁, 민주화 투쟁, 민족 일체 화해를 위한 통일 운동 세 가지 민족의 물줄기는 민족의 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많은 역사학자들이 오늘의 국민의힘의 뿌리는 이완용부터 이승만 자유당 독재, 박정희 독재 잔재들, 전두환 후예들, 이것이 바로 국민의힘의 뿌리다, 이것을 우리가 척결해야 된다고 얘기하는데 저도 공감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우리들이 미숙했기 때문에 45년 이후에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어요.
더군다나 박정희로 말할 것 같으면은 교사하던 사람이 혈서를 써서 만주 일본 사관학교에 들어가서 독립군들을 토벌했죠. 해방이 되니까 귀순해서 우리 국군이 되는데 48년 여순항쟁 때는 자기 친구들, 동료들 이름을 다 넘기면서 살아남은 자예요. 자기 형은 박상이라는 훌륭한 민족 민족운동가인데도요. 그리고 5.16 군사 반란도 자기가 했어요. 끝나면은 군정 복귀한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복귀도 안 해요. 그리고 또 대통령도 두 번만 한다고 그랬다가 세 번, 영구 집권을 꿈꾸다가 자기 동료 부하 김재규한테 총 맞아 죽었잖아요. 박정희는 존재론적으로 네 번을 배신한 자예요. 아주 배신의 존재야. 이런 자를 우리가 끊지 않고서 어떻게 민족정신을 이룩할 수 있는가 이런 내용들을 제가 기도하면서 깨달은 내용들이에요. 이런 내용들을 특별히 경상도의 역사 의식을 잘 모르시는 분들께 호소하고 싶은 거예요. 민족정신은 역사를 잘 알아야 되고 정신을, 뿌리를 알아야 돼요. 대구 지역이 원래 정말 아름다운 항일의 본거지였잖아요. 그 정신을 우리 경상남북도가 되찾아서 민족의 오점인 이런 것들을 싹 쓸었으면 참 좋겠어요. 윤석열을 탄핵할 수 있는 이 기회가 그런 기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억하고 계승하는 것이 넓은 의미의 종교
안병권 : 26살 어린 존재였던 김상진 열사가 박정희 독재에 항거하며 순교적 할복을 했는데 그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고, 우리 역사에 자리매김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함세웅 : 제가 가톨릭 신부입니다만 어떤 의미에서 ‘사회 운동가들, 투신한 분들이 우리보다 더 종교적이구나’라는 생각을 해요. 그 아름다운 후배, 동료들의 헌신을 끊임없이 기억해 주는 거예요. 기억해 주는 것이 아름다운 기도거든요. 특별히 제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있을 때 유영표 부이사장님으로부터 김상진 열사에 관한 이야기, 후배들의 활동을 많이 들었어요. 들으면서 제가 감동받고 ‘아 참 훌륭하다, 아름다운 후배들이 계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 기억하고 계승하는 것이 넓은 의미에서 종교예요. 우리들이 선조들을 기리는 제사나 차례가 아름다운 기억의 행위 아닙니까? 우리 종교도 가톨릭인 경우는 예수님의 행업을 기리면서, 순교자들을 기리면서 기도하는 거거든요. 우리 민족사에 순국선열들, 우리 김상진 열사와 같은 분들을 기리면서 다시 자극을 받고, 불의 앞에서 아름답게, 용기 있게 살자고 다짐하는 거, 그 자체가 아름다운 기도고 또 민족 정신이고, 또 아름다운 삶의 방향과 선택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여러분들을 존경합니다.
안병권 : 아이고 감사합니다. 유영표 선배께서 <1975.김상진> 영화 찍을 때 ‘김상진 열사의 죽음은 안중근의 죽음과 무게가 같다, 전봉준의 죽음과 무게가 같고 전태일의 무게하고도 같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결국은 그런 힘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신부님 말씀대로 지금까지 흐름을 지탱해 오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요즘 탄핵 국면을 보면서 윤석열 탄핵 이후 국면 그리고 시민들의 저항과 연대를 원로 입장에서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새 술은 새 부대에, 응원봉을 든 새로운 희망의 세대
함세웅 : 제가 지난 11월 초에 뉴욕과 워싱턴을 방문했습니다. 교포들 초청으로 한국의 민주화에 대해서, 윤석열 정권이 어떻게 마무리돼야 되는가에 대해서, 시대적 고민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었는데요. 교포들의 ‘윤석열 정권은 언제 끝나냐’는 질문에 제가 가만히 있다가 ‘어쨌든 올해(2024년) 안에 끝납니다. 안 끝나면 나라가 망합니다’라고 답했어요.
그런데 12월 3일 밤 10시 반에 전화가 온 거예요. 윤석열이 계엄령을 발동했다고 그래서 제가 깜짝 놀랐어요. 전화들이 오면서 저보고 피하라고 그러기도 하고 국회로 오라고도 하더라고요. 그러던 중 주진우 기자가 자기 국회로 간다고 그러면서 신부님 어떻게 보세요?라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성공할 수 없다. 언론부터 장악을 해야 되는데 언론이 생중계를 하고 있지 않냐, 그게 되겠냐’고 얘기했죠. 그러나 또 한편 물론 염려도 되죠. 이후 국회에서 해제 선언이 됐잖아요. 그제서야 마음이 놓이더라고요. 그래서 감사 기도 드리고 잠을 잤는데요. 저는 해석이, 우리가 윤석열을 끌어내릴 수가 없어요. 근데 이 사람이 자기가 스스로 무덤을 팠어. 그리고 자기 무덤에 자기가 들어간 거야. 그 얼마나 고마워요. 그래서 내가 한 주일 내내 하느님께 감사하기도를 드렸어요. 하느님 정말 감사합니다. 역사를 이렇게 변화시켜 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제가 늘 평소에 얘기할 때 우리 한국의 역사를 압축하면 이승만 시대 때는 친일 경찰을 중심으로 한 경찰국가였어요. 박정희 때는 중앙정보부 독재 국가였죠. 전두환 때는 군인 독재 세상이었죠. 그동안 검찰은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근데 89년 6월 항쟁 이후에 우리가 민주화를 이룩했잖아요. 그러면서 검찰권도 확보하게 된 거예요. 그럼 검찰권을 찾아준 게 누구냐, 우리 시민들, 청년‧학생들이죠. 그런데 윤석열이 그 뒤에 검찰이 된 친구잖아요. 이놈은 이 역사를 모르는 놈이야. 검찰권은 우리가 찾아준 것인데 이걸 남용했어요. 한편으로 윤석열과 같이 불의한 검찰한테 조사받았던 모든 민중들의 억울함을 우리가 좀 집대성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에요. 그런 운동이 좀 펼쳐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또 체포영장을 발표해도 안 나오잖아요. 이런 나쁜 놈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나는 다행인 게 저렇게 오래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나는 이렇게 나쁜 놈입니다’라고 온 천하에 알려주는 게 너무너무 고마운 거야. 우리 교리서에서는 계시(啓示)라고 그래요. 열어서 보여준다. 하느님도 계시(啓示)지만 자기 스스로 자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야. ‘나는 이렇게 나쁜 사람입니다. 흉악한 놈입니다. 도둑놈입니다’라고 보여주는 거야. ‘이게 윤석열입니다’라고 보여주기 때문에 저는 요새 분노하지 않고 ‘아 그래 네 모습을 네가 보여줘라. 이놈아, 네 한계를 네가 보여준다’ 이러고 제가 기도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동안 애쓰셨던 많은 분들. 특히 청년‧학생들, 여성들의 응원봉을 보면서 ‘야 정말 아름다운 시대가 왔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죠. 비상시국회의에서 저희도 이제 원로인데 모일 때마다 ‘청년‧학생들이 왜 들고일어나지 않냐’며 막 그냥 울부짖었어요. 그랬는데 방송 보도를 보니까 마산에서 학생들이 움직임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너무너무 기뻤어요. 이제 움직임이 있구나 그랬는데 뜻밖에 여의도에서 계엄한 날 모이는 분들, 특히 여성들이 더 많다고 그러셨는데 응원봉을 들고 왔잖아요. 저는 그 응원봉을 보면서 많은 걸 깨달았어요. 민주화를 위해서, 자유를 위해서, 인권을 위해서 응원봉을 든 거죠.
그리고 더 아름다운 거는 이미 외신에서 다 예찬했습니다만 사전 결제 문화라든지, 또 끝나고 나면 깨끗하게 청소를 한다고 그러잖아요. 외신 기자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얘기해요. 외국에서는 그렇게 되면 항상 폭동이 일어나고 약탈이 일어나는데 그런 모습은 일절 없고 다 쓰레기 주워가고 하는 봉사와 배려 문화를 본 거죠. 저도 흐뭇했고요. 세월호 참사를 겪은 세대, 이태원 참사를 겪은 세대 동년배들의 세대가 성장해서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이 되었다, 이런 내용들을 얘기하면서 우리 시대와는 전혀 다른 아름다운 가치를 가지고 있어서 정말 희망이 있어요. 그래서 이제 그야말로 묵은 세대는 가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된다’는 성경 말씀과 함께 이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꿈을 보면서 격려와 박수를 보냅니다.
안병권 : 다른 원로 어르신들도 마찬가지 심정이시겠죠?
함세웅 : 네네, 똑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 제가 사제로서 놀란 거는 우리 사제들은, 교회 문화는 어쨌든지 종교적인 통제가 있잖아요. 그런데 자발적으로 모인 분들인데 저렇게 희생과 헌신이 있어요. 희생과 헌신이 종교의 핵심인데 종교인들보다 더 희생과 헌신을 보여주신 분들이다, 이런 감동을 받았어요. 아름다운 가능성입니다.

50년은 희년(禧年), 은총의 해
안병권 : 그래서 이제 김상진 열사 50주년을 맞이해서 김상진 열사의 정신을 젊은 세대들에게 나름대로 의미 있게 좀 이렇게 자리 잡도록 하고 싶거든요.
함세웅 : 2025년은 많은 의미를 가진 해입니다. 먼저 50년은 성경에서나 가톨릭에서는 희년(禧年)이라고 불러요. 희년은 기쁜 해, 은총의 해라는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옛날 구약 시대 성경 때는 노예들을 해방시켜 줬어요. 또 각자 고향에 찾아가서 부모, 형제, 친척을 만나라, 빚진 사람들도 탕감해 줘라, 그래서 새로 시작을 해라. 그게 구약 성경에 나오는 희년의 의미인데 가톨릭은 그 역사를 받았다가 50년이 너무 길잖아요. 그래서 25년마다 한 번 희년을 하는데 올해가 바로 희년입니다. 우리 가톨릭에서 정하는. 지난해 12월부터 2025년이 희년인데 희년의 의미는 항상 기본적으로 사랑과 나눔 또 약자들에 대한 돌봄 이런 게 있어요. 올해가 또 뱀의 해잖아요. 성경에서 뱀을 슬기로운 상징으로 봅니다.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양순해라’ 이게 복음 성경 말씀이에요. 그래서 뱀의 해를 맞아 뱀처럼 슬기로워야 되겠다, 그러나 비둘기처럼 양순한 가치를 가지고 살자. 그런 교훈을 함께 묵상했어요. 특별히 올해는 1905년 을사늑약 120년을 맞는 해예요. 1945년 해방 80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고요. 또 1965년 박정희의 한일굴욕협정 60년을 맞는 해예요. 그 뜻이 참 많은 해인데 그런 역사적인 모든 것을 함께 함께 간직하면서 2025년 이 해는 정말 재생의 해, 역사적인 부활의 해, 상승의 해, 비약의 해로 우리가 만들어야 되겠다, 이 해에 윤석열을 우리가 파면하게 되니까 얼마나 큰 뜻이 있어요? 그래서 윤석열 파면과 함께 정말 역사적으로 새해를 만드는 그러한 은총의 해, 이걸 젊은이들 특히 저 여성 응원봉을 중심으로 한 젊은 청년들을 중심 세대로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꿈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안병권 : 새로운 세대, 새로운 물길들에게 해 주시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실까요?
함세웅 : 1월 1일과 설 미사 때 성경 말씀은 민수기 6장의 말씀이에요. 모세가 아론 사제에게 전해준 말씀인데 모인 백성들에게 축복을 전합니다. 그 축복 인사를 6번을 반복해요. 우리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를 하지 않습니까? 근데 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여섯 번을 반복하는 거예요. 이 민족에 축복을 내려주시고, 웃음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지켜주시고, 은총을 주십시오라는 여섯 번의 반복. 우리가 새해 인사를 나눌 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의례적인 인사를 합니다만 그런 의례적인 인사 속에 마음을 담아서 정말 상대방의 건강을 위해서, 우리 민족의 건승을 위해서, 남북의 일치와 화합, 또 팔레스테인 전쟁의 종식과 우크라니 전쟁 종식 등을 염원하면서 세계 평화를 위해서 바치는 아름다운 기도와 축복의 인사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 모든 시민들은 물론 청년‧학생들 그다음에 안타깝지만 우리와 생각이 다른 분들, 그런 분들을 껴안을 수 있는, 또 그런 분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러한 언행을 통해서 올해 한 해를 잘 살면 참 좋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영육 간 건강을 기원하면서 함께합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 시대에 새로운 김상진 열사가 되도록 다짐합니다.
안병권 : 외람되지만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책에서 김상진 형에 대해서 기도를 주시잖아요. 그리고 75년도에 명동 성당에서도 상진이형을 위해 기도해주셨는데요. 끝으로 2025년에 상진이 형을 위한 기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함세웅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거룩하신 하느님 새해 첫 달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또 곧 설을 맞게 됩니다. 우리 사랑하는 김상진 열사 기념사업회 관계자들과 함께 모여 김상진 열사에 대한 삶을 되새기며 시대를 또 되돌아보았습니다. 이 영상을 또 보게 될 많은 이들 특히 젊은이들을 위해서도 기도 올립니다. 거룩하신 하느님 하느님께서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글로 기록해 주셨기에 그 글을 통해서 많은 이들이 깨우침을 얻습니다. 성경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언행을 기록한 문서입니다. 그와 똑같이 김상진 열사에 대한 이 기록도 김상진 열사에 대한 삶뿐 아니라 1970, 80년대 그 이후의 삶을 담은 역사적 기록과 증언입니다. 이 기록과 증언을 통해 젊은이들이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우고 익혀 또 김상진 열사와 같은 가치를 지니고 같은 삶을 살기를 바라며 기도 올립니다.
하느님, 우리 모두 그 시대에 예수님이 되라는 성경 말씀과 같이, 우리 시대에 바로 새로운 김상진 열사가 되도록 다짐합니다. 침묵만 지키면, 졸업만 하면 보장될 그 미래를 뒤로 미룬 채 현실의 개혁을 위해서, 또 독재자 타파를 위해서 목숨 바쳤던 우리 김상진 열사의 희생과 헌신의 삶이 우리 삶의 길잡이가 되도록 바라며 인도합니다. 절대로 무력에 빠지지 않고 아름다운 민족 가치, 정신적 가치, 공동체 가치를 지니며 살아가는 은총의 성숙한 시민이 되게 해주십시오. 우리 겨레 모두를 축복해 주시며, 남북의 일치와 화해를 위해서 노력하겠습니다. 또 다른 김상진 열사가 되도록 하느님 도와주십시오.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