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7:39 오후 139호(2025.01)

[실화소설 ‘사막의 과학자’]
“옳은 결정을 내리길 기대합니다.”

노광준 OBS 피디, ‘오늘의 기후’ 뉴스레터 발행, 농화학 88

서울경찰청 소속 유동수(가명) 경위는 조폭들이 가장 겁내는 ‘무술경관’이었다.

여기에 경호 관련 특수훈련을 받고 청와대 경호부대로 차출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상부지시가 내려온다.

– 요인경호를 맡는다.

– 누구입니까?

– 서울대 황우석 교수다. 해외출장이 좀 많을 거야.

‘서울대 황우석 교수에게 신변안전을 위한 경찰청 경호원들이 배치됐다. 서울경찰청 경호과 소속으로 알려진 이들 경호원은 앞으로 정부의 별도 특명이 있을 때까지 황 교수의 신변안전을 책임질 무술경관들.’ (연합뉴스, 2004년 10월 14일 기사)

내가 그를 수소문 끝에 만났을 때, 그는 정말 큰 키에 날렵한 몸매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눈매는 영화에 나오는 경찰들처럼 사납지 않았다. 많은 이들 앞에 노출되는 경호경찰의 특성이리라 짐작한다. 2017년에 만났으니 그도 어느새 파출소장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서울대 근처 지구대였다.

“이 집에서 황 박사님과 연구원들이 회식을 자주 했습니다. 그때는 워낙 대식구였으니까, 비교적 저렴하면서도 주인장 인심이 좋은 이 집이 딱이지 않았나^^”

그가 데려간 곳은 서울대 근처의 초밥집이었다. 황 박사의 안부부터 먼저 묻는 초밥집 여사장님과 함께 셋이서 점심을 먹으며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 정말 성실한 분으로 기억합니다.

– 예를 들면?

– 해외출장이 많았습니다, 뉴욕은 정말 자주 갔고 섀튼 교수 집에도 여러 번 갔고, 심지어 노벨상 주는 나라, 스웨덴도 가서 그곳 학자들한테 환대도 많이 받았는데, 그러다 보니 비행기에서 보내는 시간이 정말 길잖습니까, 10시간, 15시간, 20시간, 그런데 거의 잠을 안 주무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후 일정을 생각해서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는데 황 박사님은 항상 노트북을 열어놓으시고 연구발표자료를 검토하시고…. 전혀 눈붙이는 시간이 없으신 것 같았습니다. 밑의 교수들, 강성근 교수나 이런 분들이 동행하는데도 그분들한테 시키지 않으시고 본인이 직접 연구자료 챙겼습니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NT-1 논문이 발표된 후인 2004년 하반기부터 황 교수에 대한 요인경호를 시작했다. 두 번째 <사이언스> 논문이 발표되는 2005년부터는 아예 경호팀을 꾸려서 3부 요인급 경호로 격상시켰다. 3부 요인이란 대통령과 그 가족, 국회의장·대법원장·국무총리 등을 말한다.

“9명이 24시간 경호근무했는데 3명씩…. 저까지 10명이 근무했습니다. 저는 팀장이고 3명씩 근무하면서 3교대로 돌아갔습니다. 저희 인원 10명이나 국무총리실 10명이나 똑같은 팀을 구성했습니다. 국무총리, 국회의장, 우리 황박사님 똑같은 수준으로.”

3부 요인급 경호…. 그 말을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대단한 특혜 아닌가, 그러나 정작 경호를 받는 당사자에겐 당혹스러운 일도 생겼다. 3부 요인급 경호 덕분에 황교수의 부인이 차를 공출당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면,

“3부 요인을 제외하고는 정부에서 딱 1대만 차량을 지원합니다. 모두 3대가 필요한데, 정부에서는 1대만 나오니까 나머지 2대의 그랜저를 제가 제공해야 하는 거죠. 당시 제가 타던 (20만 킬로 뛴) 소나타는 적절치 않다고 하시니까. 그래서 집 사람이 시집오면서 장모님한테 받은 ‘그랜저’를 제공했고, 집사람에게 헌 차 타라고 하기 미안하니까 제 책 인세에서 ‘SM5’를 사준 거죠. 그리고 나머지 한 대의 ‘그랜저’는 지인들이 돈을 모아 해 줬고….” (황우석 박사, 2015년 1월)

결과적으로 황 박사의 부인은 ‘그랜저’를 공출당한 뒤 ‘SM5’를 탔고, 황 박사는 자신의 인세와 지인들 신세를 져가며 경호를 받았다. 그런데 훗날 검찰은 마치 황 박사가 연구비를 횡령해 부인 차를 바꿔준 것처럼 언론에 흘렸다. (차 바꿔준 건 맞지, 그랜저를 SM5로) 이후 연구비와 무관하다는 게 뚜렷해 기소조차 못한 사안이었지만, 당시 언론보도는 지금도 포털에 남아있다. 부인 차를 바꿔주는 등 돈세탁과 횡령의 달인이라는 뉘앙스의 기사들…. 나는 이 사건을 보면서 왜 검찰수사를 받던 인사들이 도중에 한강대교로 가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유동수 경위가 황 교수를 그림자처럼 경호하며 모습을 드러낸 곳은 유엔(UN) 총회장 부근이었다. 2004년 10월, 당시 미국의 부시 정부는 치료 목적의 배아복제연구까지 전면금지시키려는 유엔결의안을 추진하고 있었다. 일명 ‘코스타리카 안’으로 불리는 이 결의안은 인간복제는 금지하되 치료 목적의 연구만은 제한적으로 허용하자는 한국과 일부 유럽국가들의 일명 ‘벨기에 안’과 맞붙으며 치열한 물밑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노무현 정부는 전방위적으로 지원했다. 바이오 외교대사를 파견해 국제협력을 도왔고, 특허청은 줄기세포 특허등록을, 국정원과 경찰청은 연구실 보안과 경호를 맡았다.

“우리 경찰 외에도 국가정보원이나 이런 곳에서 파견 나와서 근무하는 직원이 있었고 (제가 근무한 지) 1년 되어갈 무렵에는 외무부에서 한분이 나와서 근무했습니다.” (유동수 당시 경호팀장, 2017년)

2004년 10월 21일, UN의 법제·사법위원회 격인 총회 6위원회에 두 개의 안이 올라왔다. 둘 중 하나를 채택해야 하는 UN은 이틀 간의 찬반 토론에 들어갔고 물 밑에서는 미국과 그 외 국가들 간의 득표 경쟁이 벌어졌다.

황 박사도 뉴욕으로 날아갔다. 그는 절박했다. 연구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 부시도 절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재선의 상대는 민주당 존 케리였고 선거 막판 최대 변수는 ‘배아줄기세포 논쟁’이었다. 박빙의 선거전에서 상대 존 케리는 수시로 부시의 배아줄기세포 정책을 공격하며 추격전을 벌였다. 이 와중에 메가톤급 악재(부시에게는)가 터졌다. 대선을 불과 3주 앞둔 10월 10일, 영화 ‘슈퍼맨’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리브가 사망한 거다. 줄기세포 논쟁은 정점에 달했다. 불의의 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할리우드 스타가 임종직전까지 줄기세포 연구 지원을 호소하는 그 간절한 메시지는 미국인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당신께서 작고하시기 얼마 전에 (저와) 직접 전화통화를 했었습니다. (UN총회가 열리는) 뉴욕으로 직접 오겠다고 하셨어요. 꼭 돕고 싶다고.” (황우석 박사)

미국 내 선거 여론조사 기관들은 줄기세포 관련 논쟁이 케리가 부시의 지지 기반을 뺏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현안이라고 진단했다. 이런 국면에서 부시 진영은 무엇을 기대했을까, UN 본부에서 날아올 복제 전면 금지 안 확정 소식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까, ‘보라. 미국만이 아니다. 전 세계가 이 연구를 금지하는 것에 동의했다.’ 이 한 마디면 끝일테니까. 유엔에서의 구속력 있는 ‘금지 조약’,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번에도 슈퍼맨이 도왔다.

“옳은 결정을 내리길 기대합니다.”

슈퍼맨 생전의 영상이 공개됐다. 슈퍼맨은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는 이 연구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담긴 영상을 미리 촬영해 뒀던 것이다. 그의 유족들이 영상을 들고 왔다. 영상은 UN 토론을 일주일 여 앞둔 10월 13일, 한국정부가 각국 외교관들과 UN 출입 기자들을 초청한 UN 본부 인근 한 강연회장에서 공개됐다.

“옳은 결정을 내리길 기대합니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과학적인 지식은 전 세계 수많은 환자들에게 희망을 줄 겁니다.”

당시 행사장은 미국 전역에서 온 난치병 환자들과 가족들, 단체들로 가득했다. 그 간절한 목소리들이 슈퍼맨의 생전영상과 함께 공명을 이뤘다. 이후 유엔 본부의 토론이 시작됐다. 어떻게 됐을까, 유엔은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부시가 바라던 전면 금지안도, 제한적 허용안도 채택하지 않았다. 10월 21일과 22일 이틀간 치열한 찬반 토론을 벌인 UN 회원국들은 두 가지 안 중 그 무엇도 전 세계적으로 비준을 받을 만큼의 구속력을 지니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이후 비공개 논의만 거듭했다. 그 사이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끝났고 이후 유엔은 인간복제에 대한 금지 선언만 채택했다. 논란의 핵심이던 치료 목적의 세포 복제 연구에 대해서는 구속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렇게 유엔에서의 복제 연구 금지 조약은 폐기되었고, 황 박사는 공식적으로 연구재개를 선언했다.

그가 유동수 경위와 함께 1호차를 타고 간 곳은 인천 길병원이었다. 그곳에는 열 살 소년이 있었다.

소년 : 아저씨가 황우석 교수님이죠? 저 잘 생겼죠? 제 이름은 00이라고 해요.

교수님 저 좀 일으켜주세요. 엄마가 저 때문에 매일 우세요.

황교수 : 이 아저씨가 사회적으로 모진 압박과 갖은 태클을 당하더라도 의사 선생님들이 너한테 직접 시술해 줄 수 있는 그 단계까지 내가 반드시 이 기술을 개발하고야 말 테니…. 대신 너도 공부 열심히 하고 지금의 이 의젓하고 밝은 모습 잃지 않겠다고 약속해 줄 수 있니?

소년 : 네^^

허언도 희망고문도 아니었다. 나는 과학자로서 열심히 해볼 테니 너도 희망 잃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보자는 둘 사이의 인간적인 약속이었다. 이날의 만남 이후 황우석 팀은 소년의 체세포를 갖고 실험에 들어갔다. 이후 소년의 아버지는 기관생명윤리위원으로 활동했고 소년의 어머니는 자신의 난자를 기증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사기꾼 황우석이 난치병 환자 가족한테 ‘내가 널 일으켜주겠다’고 뻥치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말을 해줄 생명윤리위원과 난자까지 확보했다는 식으로 비판한다. 이런 지적은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 황박사는 물론이고 소년 가족의 선의를 왜곡하는 ‘2차 가해’이다. 줄기세포 연구가 시작되었을 때, 소년도 소년의 아버지도 소년의 어머니도, 내년이면 혹은 내후년이면 그 치료를 받아서 벌떡 일어설 거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기대감을 앞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마음이 조급함으로 이어져 연구진에게 부담으로 다가올까 봐 이들은 오히려 ‘언제?’라는 의문부호를 마음속 저 깊은 곳에 가라앉혔다. 대신 이 연구가 정말 잘돼서 많은 이들에게 희망이 되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소년은 이미 줄기세포 연구 대상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인천길병원 같은 병동에 있는 환자들 사이에 스타이자 아이돌이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가끔씩 황 박사로부터 걸려오는 전화, 잘 되고 있다는, 임상이 가능해진다는, 그런 경과보고를 듣고도 떠벌리지 않고 꼭꼭 숨긴 채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솔직히 반신반의했죠. 처음에 황 박사님 말씀하셨을 때에는 우리 아이가 빠른 시간 내에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란 생각을 안 했어요. 이 아이가 장성해서 20세. 제가 봤을 때 그때 생각에 스무 살 넘어서도 괜찮다. 이 아이가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먼 안목을 봤었기 때문에 사실은 저희로서는 그것(임상)에 대한 빠른 시간 내에 대한 기대도 없었고 그랬었지요. (소년의 아버님, 2015년 2월 11일)

늦어도 상관없었다. 언젠가 될 거라는 희망으로도 충분했다. 이미 소년과 가족들은 마음을 비우고 난치병과의 장기전을 치를 준비를 해왔다. 집 옥상에 아이가 낚시를 할 수 있는 간이 낚시터와 낚시기구를 만들었다. 소년이 옥상까지 휠체어를 타고 오르내릴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까지 설치했다. 아이가 일반인 못지않게 잘할 수 있는 것이 낚시였고. 아빠와 함께 하며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이는 물고기의 손맛을 처음 느낄 때 까르르까르르 마음껏 웃었고 집 근처 낚시터로 아빠와 함께 낚시 가는 걸 즐겨했다. 아빠는 잡혀준 물고기한테 감사해했다.

소년의 체세포가 핵이식 실험에 들어간 날은 2004년 9월 17일이었다. 검찰수사기록에 따르면 이날의 핵이식 실험은 NT-1 줄기세포 수립에 성공한 뒤 새튼 교수의 초청으로 미국 피츠버그 의대로 유학 간 박을순 연구원 후임으로 핵이식 실험을 총괄한 20대 김0수 연구원이 담당했다. 김0수 연구원 또한 새벽 도축장에서 동물 난소를 구해와 핵이식을 하면서 다양한 동물 실험으로 기본을 닦아온 에이스였다.

“약 7년간 근무하면서 대략 따져보니까 15만 개의 난자를 다뤘던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 약 10만 개의 난자를 갖고 체세포 핵이식 연구를 실시했고 소, 돼지, 개, 심지어 원숭이까지 체세포 복제연구를 수행하고 나서야 황우석 박사님으로부터 인간체세포복제 연구를 수행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김0수 연구원의 국회토론회 발언, 2007년 2월 7일)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실험을 너무 많이 반복해 나중에는 목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한의원에 침을 맞으러 다녔다고 하는 핵이식 실험이었다. 숙련된 연구원들은 소년의 체세포 안에 있는 세포핵을 빼내 기증받은 난자에 이식시켰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일주일이 지난 9월 24일, 김0수가 핵이식한 세포 하나가 배반포 단계에 도달했다. 배반포는 줄기세포로 커나갈 내부세포괴라는 세포 덩어리를 품고 있는 주머니 모양의 배아였다. 8세포기를 넘어 줄기세포로 배양되기까지 4부 능선을 넘어선 상황, 그때부터 미즈메디 배양팀의 몫이었다. 복제 배반포를 영양세포 위에서 줄기세포로 잘 배양시켜 무한증식의 꽃을 피워내는 작업, 그 첫 작업인 씨딩(seeding)에 돌입했다. 영양세포 위에서 세포배양작업이 시작됐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씨딩을 한 지 일주일 후 배양접시 위에서 세포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황 박사는 배양책임자 S에게 물었다. 만들어질 수 있겠느냐고, S는 답했다. 줄기세포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10월 5일 아침엔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 영양세포 위에 붙어서 영양분을 공급받고 있어야 할 세포덩어리가 아예 영양세포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세포들은 모두 굻어죽게 될 상황, 큰 일이라며 걱정하는 황 박사를 뒤로 하고 S는 미즈메디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그곳에 있던 뭔가를 가져왔다. 바로 미즈메디에서 수립되어 배양되고 있던 미즈메디의 수정란 줄기세포(Miz-4), 즉 가짜 줄기세포를 몰래 가져온 거다. S는 이미 배양되어 무한증식되고 있던 가짜 줄기세포를 몰래 들여와 생사를 오가고 있던 소년의 세포 위에 덮어씌웠다. 이렇게 하면 결과는 뻔하다. 줄기세포로 자리 잡아 왕성한 생명력을 가진 가짜(Miz-4)가 영양세포 위에 자리 잡고 영양분을 모두 섭취했다. 반면 생사를 오가던 진짜(소년의 세포)는 완전히 나가떨어져서 모두 죽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영양세포 위에서 잘 자라고 있는 세포가 가짜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위험에 처한 소년의 세포가 결국 S의 돌봄을 통해 줄기세포로 자리 잡았다는 착각에 빠졌다.

“잘 붙었습니다. 콜로니가 형성됐습니다.”

S의 말에 다음날인 10월 6일 아침 황우석 교수팀 실험실은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다.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더구나 국정원 요원까지 파견되어 외부 반출을 엄격히 통제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검찰 수사 결과 S는 이렇게 움직였다.

– S는 유일하게 세포의 외부반출이 가능한 ‘계대배양’ 명분을 활용함.

– 계대배양이란 5-7일 간격으로 수명이 다한 영양세포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그 위에 배양 중인 세포를 옮겨 담는 작업으로 한 번 갈아주면 1계대, 또 갈아주면 2계대, 이런 식으로 계대를 바꿔주며 줄기세포의 대를 잇는 작업을 말함.

– S는 계대배양에 필요한 새 영양세포 배양접시를 미즈메디에 가서 가져오면서 그 위에 미즈메디에 보관되어 있던 가짜 줄기세포(Miz-4)를 심어놓은 채 서울대로 들여옴.

– S는 당시 서울대 줄기세포 팀장인 권대기 연구원에게 ‘계대배양’을 하겠다며 진짜 세포(소년의 세포)를 넘겨달라고 요청했고 권대기 팀장은 이를 넘겨줌.

– S는 계대배양 시 조명이 밝으면 세포에 좋지 않다며 불을 모두 꺼달라고 요청한 뒤 클린벤치의 조명만 남긴 뒤 자신이 가져온 가짜 줄기세포를 진짜 세포에 섞어 넣음.

– 서울대 권대기 연구원은 계대배양이 잘되었는지 현미경으로 세포상태를 관찰하려 했지만 S는 세포 건강에 좋지 않다며 현미경 관찰을 못하게 했고 인큐베이터(세포배양장치) 근처에 누구도 얼씬거리지 말 것을 당부함.

만일 계대배양 직후 권대기 연구원이 현미경으로 세포의 배양상태를 관찰했더라면 육안으로 보더라도 뭔가 다른 상황임을 직감할 수 있었겠지. 섞어 심기를 한 직후에는 이미 줄기세포로 잘 자라고 있는 가짜와 생사를 오가던 진짜 사이에 확연한 차이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서울대 연구원들은 순한 양처럼 S의 말대로 인큐베이터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당시 서울대 연구원들에게 S는 생사를 오가던 세포를 건강하게 살려낸 ‘신의 손’이었다. 가짜를 조작해 낸 신의 손은 황 박사에게 NT-2의 성공을 알렸다. 이후 DNA 검사용 시료까지 조작해 소년의 체세포와 줄기세포의 유전자 지문이 정확히 일치한다는 (거짓) 보고를 올렸다. 황 박사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단 1%도 의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황 박사 24시간 경호를 담당했던 유동수 경위는 이렇게 말했다.

“저희 동선에 미즈메디 병원도 있었죠. 저는 1호차 앞자리에 앉아있었고 황 박사님은 1호차 뒷좌석에 앉아있었는데 (미즈메디) 갈 때마다 거기서 연구자 한 분이 황 박사님 옆자리에 동석해 같이 타고 가면서 ‘연구 잘되고 있다’, ‘검증 결과 확실하다’라며 함께 기뻐했어요. 조금이라도 이상하게 돌아갔으면 차 뒷좌석에서 그런 대화를 나눌 이유가 없잖아요.”

S는 왜 이런 엄청난 조작을 했을까, 검찰은 S가 선임 P와 실력을 비교당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렸다고 설명한다. 같은 미즈메디 출신으로 그의 선임이던 P박사는 소년의 세포보다 더 상태가 안 좋았던 NT-1(1번 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해 내 보란듯이 미국 피츠버그 의대로 유학을 갔는데, 오롯이 자신의 책임이던 줄기세포 배양에 실패한다면 해외유학 기회는 물론이고 자신의 실력까지도 의심받을 수 있어 강한 스트레스를 받던 끝에 조작에 이르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게 다일까, 국정원이 관리하고 경찰경호가 이뤄지던 실험실에서? <PD수첩> 제보자는 S에게는 든든한 배후(또는 조력)가 있었으며 그가 바로 황 박사라고 주장했다. 여성 연구원에게 난자기증까지 강요할 정도로 황우석은 뭐든 하고 남을 인물이기에 틀림없이 S를 사주해서 조작을 지시했을 거라는 일관된 주장…. 그러나 제보자의 주장은 검찰 수사 과정에서, 이후 법정공방 과정에서 기각된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정황증거가 있었으니까. 바로 소년에 대한 임상시험 추진이었다.

‘소년에게 가짜줄기세포로 임상시험까지 추진해? 애 죽이려고?’

처음에는 나도 이렇게 생각했었다. 의사출신인 <PD수첩> 제보자는 자신이 제보를 결심하게 된 배경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줄기세포가 가짜라고 확신하는 가운데 소년에 대한 임상시험이 추진된다는 정보를 듣고는 환자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를 막고자 제보를 결심했다’는 취지로 답해왔다. 그러나 이런 제보자의 주장은 임상시험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전문가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뇌피셜’이었다. 임상시험은 줄기세포 연구와는 판이 전혀 다른 치료의 영역이다. 때문에 임상시험은 의사들이 주도하며, 의사들은 임상시험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면역적합성 여부, 즉 이 줄기세포가 소년의 것이 확실한지 여부를 두 번 세 번 과학적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임상시험에 들어가게 된다. 다시말해 황 박사가 조작을 공모한 사기꾼이었다면 임상시험을 차일피일 미뤄야 했을 거다. 의사주도의 DNA 지문분석이나 조직적 합성 검사를 통해 자신의 사기행각이 탄로 날 테니까. 그러나 그는 오히려 소년에 대한 임상을 앞당기려고 뛰어다녔다.

“임상은 전혀 다른 영역이에요. (이미 임상시험이 많이 이뤄지고 있는) 제대혈 줄기세포의 경우도 임상을 앞두고 DNA검사나 HLA검사(조직적 합성 검사)는 기본 중에 기본으로 하거든요. NT-2(소년세포)에 대한 임상도 역시 그전에 DNA 등 기본 검사를 통해 만일 소년의 세포가 아니면 임상은 들어갈 수 없는 구조이죠.”

(당시 줄기세포 치료학회장을 맡고 있던 신문석 의학박사인터뷰, 2015년 2월 5일)

황 박사는 소년의 임상시험을 미국에서 시행하려고 추진했다. NT-2의 수립을 확신한 그는 정말 소년을 걷게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당시 세계 최고의 신경세포 분화전문그룹으로 꼽히고 있던 미국 슬로언케터링 암연구소의 로렌츠 스투더 연구팀에게 소년의 세포를 신경세포로 잘 분화시켜 달라는 취지의 연구용역계약을 체결하고 15만 달러의 연구지원금까지 제공하면서 소년의 체세포와 함께 소년의 줄기세포(NT-2)를 보냈다. 사기꾼이라면 DNA 검사 한 방이면 탄로 날 사기극의 증거물(줄기세포와 체세포)을 외부 연구기관에, 그것도 지원금까지 주면서 의뢰하는 일은 없었을 거다.

한편으로는 임상시험 허가와 관련되어 미국 FDA 관계자들과의 미팅을 추진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세계적인 미래석학 엘빈 토플러의 조력도 있어 보인다. 토플러는 생명공학의 미래에 관심 많은 미래석학이자 난치병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런 토플러 박사는 2005년 서울대 황우석 연구실로 찾아와 복제 개를 비롯한 다양한 연구현장을 둘러보며 황 박사와 이야기를 나눴고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특히 재생치료 미래와 관련해 ‘미국 FDA의 법제도개선이 필요하다’는 칼럼으로 보건당국을 압박하기도 했다. 훗날 법정에서는 당시 황우석 박사가 소년의 세포를 비롯해 다양한 난치병 환자들의 줄기세포 원본을 외부기관 어디 어디에 분양해 왔는지를 정리한 검찰수사기록이 공개되었다. 10군데가 넘었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과 미국의 슬로언케어팅 암연구소,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연구실 등 10곳이 넘는 연구기관에 줄기세포를 제공해 왔다.

“미국 슬로언케터링 암연구소 로렌스 스투더, 말콤 무어 박사에게 신경세포 등으로의 분화연구 목적으로 1,2,3번 줄기세포 등 넘겨주며 2005년 4-5월 경 연구비용 15만 달러 지원함” (검찰수사 별첨2. 줄기세포주 외부반출현황)

이처럼 황 박사는 소년의 임상을 향해 뛰었고, 소년과 가족들은 옥상낚시터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며, 한편 ‘신의 손’ S는 2번 줄기세포에 이어 3번, 4번, 5번, 6번까지 계속 손을 대기 시작했다. 더 고도화된 방식으로 더 과감하게, 국정원이 지키고 있는 연구실에서.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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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광준_ 우리농촌연구회에서 농업농촌의 현실을 깨닫고 토양학 실험실에서 흙을 연구하던 중 BBC ‘Farming Today’같은 농업전문방송을 꿈꾸며 방송에 입문, KBS TV 구성작가와 경기방송 PD를 거쳐 현재 OBS에서 2023년 상반기 개국예정인 OBS 라디오(FM99.9MHz)의 기후변화 전문 프로그램 준비중, 별명 기후보좌관. (pdnkj@naver.com)

Last modified: 2025-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