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11:24 오후 140호(2025.05)

[추모제를 마치고]
김상진 열사와 기꺼이 이별할 결심

50주기 추모제를 마치고

안병권 김상진 열사 의거 5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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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갑자 동박삭은 삼천갑자를 살았는데

우리네 이 망자는 30살도 못살고….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내 몸에 칼을 대고자

그날 아침 목욕재계하고 나올 때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무서웠을꼬!

사회대개혁 완성시켜 주시고요.

민주주의 완성시켜 주시고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김상진을 위하여

민주주의를 만들어

다시는 이런 세상의 죽음이 생기지 않기를….

상진형님이 이 세상과 하직하는 진혼굿 장면에서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웠다. 열사 가족석을 보니 큰 형님과 큰형수를 비롯 모두의 표정에 회한이 서린다.

2025년 4월 11일, 김상진 열사 의거 50주기 추모제 막바지, 사회자 조미경(농가정89)의 말 맺음이 생각난다.
“관악캠퍼스 75동의 「김상진홀」을 기억해 주십시오.”
“오늘 이 자리, 여러분들의 만남을 펼쳐낸 수원캠퍼스 할복의거 현장 「김상진민주광장」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서울대 농생대 두레의 길놀이를 끝으로 50주기 추모제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멘트를 들으면서 두 갈래 생각이 났다. 상반되기도 하면서 연결되기도 하는 이중 나선형 구조를 지닌 채 말이다. 그 하나는 김상진 열사를 더는 우리 쪽의 고민, 현실의 숙제에 닿지 않게, 훌훌 떠나서 당신이 사는 그 영원의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보고 환하게 웃고 지내도록 손잡고 기꺼이 보내드려야지 생각했다.
동시에 살아남은 자들의 50년간의 노고를 서로 격려하면서 새로운 50년을 맞이하자. 또 다른 방식, 또 다른 원칙과 아이디어, 또 다른 전략과 기획으로 ‘우리 미래들에게 상진형님이 ‘민주주의 역사’ 그 자체로 스며들도록 일을 도모해야지’하는 질긴 욕심이 들기도 했다. 눈물지게 상진형님을 위로·호소하는 진혼굿에 마음을 보탠 이유다.

“형님 떠나시옵소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형님 자리로 돌아가소서. 50년이 지난 지금부터는 남은 자들의 일로, 남은 우리들의 일로 삼아 목숨 바쳐 민주주의 역사에 헌신했던 당신의 뜻에 부응하겠으니 뒤도 돌아보지 말고 편히 가셔서 마음껏 형님의 삶을 누리시기를…. ”

5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2024년 2월이었다.

2019년 초에 시작해서 코로나 시기와 겹친 상태에서 3년 반, 2022년 마지막 날 다큐멘터리 <1975.김상진> 영화를 완성해서 한국영상진흥위원회와 영상자료원에 독립영화로 등록하고 2023년부터 2024년 초까지 전국 16개 시도 시사회와 지역공동체 상영회를 진행했다. 그러던 중 2024년 2월, 김상진기념사업회 이사회에 초청받았다. 영화제작 및 활동결과 보고와 향후 영화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자료를 준비해서 수원캠퍼스에서 진행한 김상진기념사업회 이사회의에 참석했다. 그런데 회의 도중에 이사들이 느닷없이 “2025년도 김상진 열사 할복의거 5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안병권 선배를 추천합니다.” 만장일치라며 이구동성 선언하는데 순간 당황했다. 영화 매듭을 짓나 싶었는데, 영화에 이어서 김상진 열사 의거 50주년 기념사업이라고 하는 민주주의 또 다른 역사를 내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잠시 숨을 고르면서 고민했다. 그러다가 이것까지가 내 생애 ‘김상진 열사와 맺은 인연’의 마지막 임무라고 하는 뇌피셜이 작동했다.

대학 3학년이던 1981년, 학내시위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고, 1년 뒤 1982년에 복교했다. 1983년 6월 9일, 자취방에서 체포당해 수원경찰서 보안분실에서 나흘째 되는 밤 ‘내일 아침에 군대에 끌려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 아버지도 뵙지 못하고 그 누구도 만나지 못하고 군대로 끌려가야 했을 때 가부좌 상태로 제일 먼저 찾았던 사람이 바로 하늘에 계신 상진형님이었다.
“어떡하면 좋을까요? 이번에 소리 없이 끌려가면 어찌 될지 모르는데, 솔직히 겁나거든요.”
“자네가 잘못한 거 없잖아! 잘될 거야 굽히지 말고, 몸 축내지 말고, 잘 살아.” 등을 토닥거리며 ‘무릎 꿇고 살지 말라’고 형님께서 다독였다. 그 장면이 상진형님과 첫 연결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군대 생활하는 동안 소신껏 잘 견뎌내고 무사히 전역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렷한 기억보다 흐릿한 잉크 자국이 더 낫다

난 평생 일기를 썼다. 그 덕분이랄까. 기록이 갖는 위대성에 추호의 의심을 가하지 않는다. 영화를 만들 때 기본 콘셉트도 ‘기록’이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50주기 추모제 콘셉도 기본 속성 값을 ‘기록’으로 가지고 갔다. 상진형님과 전후좌우에 계셨던 동료 선·후배들의 동시점에서 벌어졌던 일들, 생각들, 판단들. 돌아가신 분들도 계시지만 아직은 더 많은 분들이 계신다. 그분들로부터 그 경험과 기록과 아픔과 슬픔과 갈망들을 현시점에서 차곡차곡 기록하고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일, 이런 일들이 중요하구나 생각하면서 50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했다.

담양, 양평, 부산, 서울, 광주 등 전국 곳곳을 다니면서 실제 했던 상황들, (물론 인터뷰 대상자들의 기억에 약간 오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앞뒤 전후로 일관되게 꿰어지는 그 당시 상황들과 지난 50년간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꼼꼼하게 채록하고 영상으로 기록했다. 이 시점이 지나면 그 어떤 것도 장담하기 힘들어진다. 물리적으로 우리들이 이 세상에 있을 때 얻어내야 될 어떤 시·공간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부산 동문들 인터뷰 현장에서 발견한 단서를 토대로 김의장 선배(원예72)가 따님과 함께 50년 동안 보관하고 있던 김상진형님의 육성 원본 테이프 존재를 확인했다. 김 선배는 기꺼이 인터뷰에 응했고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 육성 원본 테이프를 기증했다.
여러 증언에 의하면 상진형님은 박영윤 선배한테 개인적으로 녹음 부탁을 했다. 당일 비행기가 뜨고 소음이 왁자지껄하고 300여 명의 학우들이 대강당 앞 잔디밭에 모였다. 박영윤 선배는 가방에 손을 대며 멈칫거렸다. “내가 대신할게요.” 한왕범 선배가 박영윤 선배 가방에서 소니 카세트 녹음기를 꺼내서 녹음을 시작했다. 그 원본 테이프가 농대 방송국장의 손으로 들어가서 방송국 기자재를 이용해 6개로 복사됐다.
‘농사단’으로 2개, ‘한얼’로 2개, ‘학생회’로 2개가 전달되었다. 그중에 농사단에서 흘러간 것으로 보이는 테이프가 CBS 같은 언론사를 통해 세상 밖으로 알려지게 된다. 다른 한 개가 농사단 회원이었던 김태홍 선배의 손을 거쳐 김의장 선배에게 건네진다. 김의장 선배는 원본 테이프를 ‘노타치, 1975년 4월 11일’이라고 쓰인 종이에 싸서 50년 동안 보관했다.

2025년 1월 21일, 김의장 선배 댁에서 인터뷰를 하고 육성 원본 테이프를 기증받았다. 테이프 카세트 플레이어를 구입해서 집(김제)에 내려왔다. 아내와 함께 숨을 죽이며 재생을 시작했다. “과연 재생이 될까?”, “안되면 안타까워 어떡하지?”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 외관으로 보기에 테이프는 아무 이상이 없었고, 떨리는 마음으로 재생을 했을 때 전혀 소리가 나지 않았다. 끝까지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아 실망하는 마음을 안고, 테이프를 뒤로 돌려서 다시 플레이 버튼을 누른 순간 비행기 소리와 함께 형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 아내와 나는 만세를 불렀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상진형님이 살아 돌아오셨다. 멈칫거리고 회한도 서린 듯하지만 당당했고, 조리 있고 똑 부러지는 야무진 정신이 깃든 <양심선언문>의 낭독 과정에 서울농대의 악명 높은 수원비행장 전투기 이륙 소음이 중간중간에 끼어있었다. 하지만 4분 6초가량의 ‘50년 전 그날’ 은 고스란히 우리 곁으로 걸어왔다. 그렇게 상진형님은 우리 곁으로 돌아왔고 50주년 기념사업회 추진위원회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선물을 받았다. 기록의 위대함을 또 한 번 느꼈다.

추모제를 마치고

50주기 추모제를 마치면서 2박 3일 동안 실컷 자고 먹고 놀았다. 어깨에 무겁게 놓여 있던 유·무형의 숙제들을 툴툴 털어냈다. 정근우 회장과 김원봉 운영위원장, 이주한 사무국장, 박석두 선배, 강석찬 선배, 임세진 편집장 등 추진위원들이 고생을 같이했다.

돌이켜보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 지난 2월 말, 3월 초, 그러니까 지난 1년간의 기념사업추진위원회 활동 결과물들이 자리매김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수원 캠퍼스 김상진 민주광장이 3월 한 달 동안 조성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2월 말까지 딛고, 읽고, 따르다 보면 김상진에 닿는다는 ‘디딤’ 콘셉트에 맞춰 모든 텍스트와 후원회원 명단, 결정 사항들을 시공팀에 보내야 했다. 동시에 추모문집도 나름대로 정리해서 출판·기획팀에 보내야 했다. 그때 닷새 가까이 거의 밤잠을 놓치고 새벽까지 보고, 또 보고 고치고, 또 고치고 빠진 것을 살피고 추슬렀던 기억이 난다. 물리적으로는 시간은 쫓기고 일은 많은데 누구한테 맡길 수 있는 성격도 아니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또 하나의 기록으로 이 상황들이 남겨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힘이 들었지만 그렇게 고비를 넘겼다. 그때가 가장 기억이 난다. 힘은 들고 입은 바짝바짝 말라갔지만 추진위원들 덕분에 한켠, 한켠 풀어냈던 기억들이 새삼스럽다. 추억으로 공유되고, 의미로운 시간으로 지난 몇 년간의 여정이 기록될 것이다.

50주년은 희년이기도 하고 새로운 단계로 상진형님과의 관계를 재구성해야 되는 시기이고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윤석열 내란을 진압하면서 대한민국을 재구성하는 국면에서 우리가 정립한 김상진 열사 할복의거 50주기 추모제가 나름 성과 있고 의미 있게 마무리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서 즐겁고 유쾌하다.
부족한 것도 있고 빠진 것도 있겠지만 그것 또한 앞으로 채워야 될 김상진 스토리이기 때문에 더 욕심내지 않고 여기까지 마무리한 부분에 대해서 스스로가 격려하고, 마음을 주고, 토닥거리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일이 만들어지게 된 데는 1988년도에 창립한 사단법인 김상진기념사업회 회원들과 오둘둘 선배들, 광주일고 추모집회 선배들, 서울공대 추모시위 선배들, 서울대민주동문회와 김상진의 의미를 따라서 살아낸 사람들의 민주적인 삶의 궤적들이 촘촘히 쌓여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결과 오늘날 이렇게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상진형님, 여기일일랑 내려놓으시고 훨훨 날아가세요. 못 다 이룬 당신의 꿈을, 활갯짓을, 거기서 마음껏 펼치세요.

자기 생명을 내놓은 사람의 뜻을 받들려면 남은 사람은 남은 사람으로서 그 명분에 맞는 삶을 살아가면 되는 일이다. 50주기 추모제를 분기점으로 열사를 기꺼이 보내드리고, 우리는 다시 살아남자.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새로운 세상을 향해 지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나가면 좋겠다. 또 김상진민주광장을 계기로 경기상상캠퍼스 내에 ‘김상진 기념관(가칭)’을 세우는 꿈을 꾼다.

50주년 추모사업이 <선구자> 특집호로 다시 표현되어 감개무량하다. 추모제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의 열망과 김상진의 삶의 지향이 가졌던 속성값은 의미가 분명히 같으리라.

50년 만에 김상진 열사와 기꺼이 이별하자. 그리고 우리의 할 일을 새롭게 맞이하자.

오랫동안, 김상진

김상진 열사 만세!

2025년 4월 20일

김상진 열사 의거 5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장 안병권

Last modified: 2025-06-06